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디모데후서 2:6-7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1
종일 마음이 어려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이었다. 아들이 어떤 사업을 한다고 하고 누가 얼마를 투자 한다고 해서 이를 현금으로 받아오느라 직접 어디를 다녀오는 날이었다. 좋은 기회다. 이런 귀인이 어디 있겠나. 누가 떡하니 그 큰돈을 뭘 보고 투자한단 말인가. 듣는 이마다 그리 해석하였다. 그런데도 마음이 어려운 건 왜일까? 다들 잘 된 일이라 하는데 나는 종일 마음이 볶였다.
아이가 글을 쓸 때면 집중력이 대단하다. 말은 장황하고 생각은 허황되나 글은 조리가 있었다. 잘 다듬으면 것도 좋을 텐데, 설명은 말로 해야 하고 듣고 이해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논리에 따를 것인데, 아이는 내 말에 횡설수설 엉뚱한 대답으로 받아 설명이 쉽지 않았다. 아이가 기도를 하고 성경공부를 시작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아이가 기도할 때 아이를 본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되뇐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
중3 아이가 뜬금없이 왔다. 가도 돼요? 할 때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늘 버릇처럼 아이는 간을 본다. 다 그만둘 것처럼 한다. 공부방도 이러저런 이유 때문에 그만둘 것을 엄마에게 요구한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며 푸념이었다. 아이 안에 감사가 없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그래서 누가 싫고, 어째서 무엇이 마땅치 않은지, 아이는 그러는 동안 누군가 자신을 위하여 마음 쓰고 참고 기다려준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렇듯 세 시간을 넘겨 아이의 말을 받아냈다. 아내에게 문자를 넣어 자초지종을 알렸다.
가정예배를 드리려는데 울컥, 어떤 감정이 치밀었다. 애써 아이를 어르고 다독여 알아듣게 얘기하여 다음 날 오기로 한 것을 아내가 전화를 해서 안 오기로 했다는 거였다. 아들은 내가 왜 마음이 어려운지 종잡을 수 없겠다는 표정으로 뚱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는 두 사람과 다시 앉았다. 단지 아이가 오고 안 오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맡기신 주의 ‘내 어린양’인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그처럼 현금다발을 배달하고 달리 송금하는 일이 앞으로 사업을 하자면 비일비재할 텐데, 어쨌든 이는 꼼수고 술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일이다.
아내는 말귀를 못 알아들었고 아들은 고집처럼 말도 안 된다는 투였다.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아롱진 양과 염소를 불려 재산을 더 축척하지 않았나. 형 에서의 축복을 자기 것으로 삼은 게 아닌가. 그게 왜 나쁜가? 하는 게 아들의 논리였다. 야곱의 모친 리브가의 모의로 장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가로챈 것은 정당하지 않다. 엄밀하게는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 다급히, 기다릴 수 없으니 자신들이 모의를 꾸민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셨다.
그 일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쫓겨 갔다. 고달픈 인생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창 30:32).” 저의 꼼수로 축척된 부는 돌아가는 저의 길을 더디게 하였고, 자식들을 편애하는 수단으로 쓰였으며 훗날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팔려가는 계기가 되었고 기어이 모두가 애굽으로 들어가 420년의 장구한 노예생활을 하는 단초가 되었다.
아흔아홉 가지를 잘 했다고 자부하는 이보다 한 가지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마음이 귀하다.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비하시다.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그러니 다윗도 뻘짓을 해서 주 앞에 죄를 지었으나, 주의 용서하심과 저가 살아내야 하는 삶은 다르다. 인생이 꼬이고 먼 길을 돌아야 하는 여정은 스스로 취한 고달픔이 대부분이다. 하나님이 야곱을 예정하시고 어떻게 축복하실 계획도 없이 그리 말씀하셨을까?
못 참겠으니 다른 수를 찾았고 그것이 꼼수와 술수였다는 데서 저의 인생은 꼬였다. 스스로 자처한 고단한 삶이다.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를 고달프게 하시는 게 아니다. 그걸 즐기시는 분이 아니다. 결국 자기 선택에 겨운 삶을 사는 일이다. 돌아야 하면 먼 길을 돌아야지 별 수 있겠나? 정당하게 계좌로 입금하면 될 걸, 일부러 거기까지 가서 그 돈을 현찰로 받아서 돌아와야 했던 여정을 다시 상기시켰다. 사업이나 장사를 하자면, 돈을 벌 목적으로 덤비는 일이면 앞으로 그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할 것이고 점점 더 교묘한 술수를 써야 할 것이다. 그리 경고하였다.
중3 아이가 밤새 편지글을 썼다. 카페에 올린 아이 글이 알림창에 뜨면 내가 읽을 것이라 아는 것이다. 나는 아이의 진솔한 글을 사랑한다. 왜 하나님이 서너 시간씩이나 돼도 않는 아이의 말을 듣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 말과 말을 이어가게 하셨는지,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주의 양이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증명은 주의 양을 먹이는 일이다. 나름의 자부심도 어떤 결단이나 확신도 아니다. 묵묵함이다. 왜 그러시지? 하는 의문 앞에서도 주를 의뢰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수고하고 애써본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남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산다고 한들. 꼼수와 술수를 써야하고, 이런저런 궁리와 계산으로 사람을 대하고, 앞서 자신의 이익을 셈해야 하는 삶의 고달픔이라니!
부디 나처럼 먼 길을 돌지 않기를. 그럼에도 주의 긍휼하심으로 오늘의 내게 이와 같은 은총을 주신 것이지만. 안돌아도 될 길이었다. 굳이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실 단잠이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아들의 표정에 나는 나의 오늘을 빗대어 말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그러므로 오늘의 궁핍한 삶이라. 그것으로 우리가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건 축복이지만, 이와 같은 곤고함과 환난을 하나님이 예비하셨다고 말하지 말자.
하나님은 저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쫓겨 가 그런 고생을 당하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그리 축적한 부로 인하여 돌아오는 길이 더디고, 자식들의 반목을 조장하는 데 사용되길 원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그때마다 주의 긍휼하심이 있었고, 그것을 마치 저의 수고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누구도 그랬잖아! 하는 식의 논리로 아들이 반론을 제기할 때 나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아흔아홉 가지의 율법을 지켰다고 해서 저가 죄인이 아닌 게 아니고, 한 가지도 제대로 지킬 수 없었다고 저가 죄인이 아니고, 우리는 모두 주의 은총이 아니면 구제불능인 죄인인 것에 대하여.
누군들 완전하고 당당하여 큰소리치겠나?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6-7).” 주를 온전히 바라는 삶이란 묵묵히 성실함이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고, 우리의 영성은 매일 똑같은 일상 가운데서 주가 맡기신 터전을 일구어가며 사는 일이다. 보다 더 잘 살려고 하는 삶이 아니다. 주가 세우시고 주가 이루셔야 하는 일에 늘 그 쓰임에 맡게 ‘거기’에 있는 것이 충성이다.
왜 꼭 그래야 해? 하는 자기 안의 안달을 이겨내고,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3-4).” 나는 살되 내가 사는 게 아니어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이 헛되고 헛됨을 일찍 깨달아 아는 것이 지혜이겠다.
부디 아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아들이 사회를 준비하며 첫 발을 내딛는 데 있어 당부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였다. 주가 세우지 않으시면 모든 게 허사고, 주가 지키지 않으시면 우리의 열심이 헛것이라. 어쩌면 우리의 지혜란 이와 같은 헛됨을 최소화하는 일이고, 그것은 주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한 것밖에 없다. ‘남들 다 그래!’ 하는 따위의 말이나, ‘누구도 그런데 뭘?’ 하는 따위의 자기변호는 어리석다. 그럼에도, 그러한데도 우리의 복됨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참 귀한 건 그럼에도 주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여지없이 또 실패하고 죄를 짓고 돌아서서 이 궁리 저 궁리 꼼수와 술수로 점철된 인생이지만, 그러한데도 주는 끝내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돌이켜 이와 같이 귀한 사역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주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마른 막대기보다 못한’ 나를 주께서 그냥 버리지 않으셨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8-9).” 부디 오늘의 이 말씀이 나의 남은 생을 흔들리지 않게 하시기를. 아들의 길을 주장하시고 붙드시기를. 아내의 마음에 주를 신뢰하는 마음을 더하시기를. 우리에게 맡기시는 그저 그 한 영혼, 저 중3 아이. 어디가 모자라 힘에 겨워하는 아이. 엉뚱한 소리로 자기 호소에만 능한 아이엄마들. 보잘것없는 그런 너와 나를 위해, 하나님이 죽으셨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1-12).” 비록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13).” 이 얼마나 귀하고 다행하고 소중한 말씀이신지.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으니, 항상 미쁘신 주가 주의 사랑을 거두실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15).”
고로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