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전봉석 2018. 9. 14. 07:04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디도서 1:15-16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편 130:4-5

 

 

 

우리가 깨끗한 건 무얼 어떻게 남다르게 하여서 깨끗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이를 믿음으로 그 믿음이 우리로 깨끗하여지게 하는 것이다. 뭘 해도 우리는 선할 수 없고 무얼 한들 우리가 깨끗할 수 없으나 깨끗하게 하신 이로 말미암아 뭘 해도, 뭘 안 해도 우리는 이미 깨끗하였다. 그 원리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여기서 모든 것이란 우리가 이해하는 그 이상의 ‘모든’이다.

 

또한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이에 그 더러움은 자연적으로 선하고 의롭고 태생이 선한 사람처럼 거짓이 없고 의로운 것처럼 사는 사람으로서 왕왕 우리 곁에 있기는 하겠나 그 또한 실은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없는 것이 이미 우리 사람은 더렵혀진 존재로 ‘믿음이 없이는’ 의롭다 하심을 입을 수 없다.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근본적인 죄악됨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하시는 오늘 말씀의 비밀은 어떠하든 사람은 사람으로서 의로울 수 없음을 다시금 일깨운다(딛 1:15-16). 곧 모든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이라.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이를 알고 바랄 수 있는 게 은총이요 긍휼하심이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시 130:4-5).”

 

어디가 아프다는 것 또는 무슨 일이 있어 마음에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 이를 무조건 피하고 물리치기 위해 애쓸 건 아니다. 이로써 주를 바라고 더욱 말씀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은혜다. 오랜만에(?) 내 발로 응급실까지 다녀오고는 종일 굶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행동거지를 바로 하고 마음가짐을 조신히 하며 어떤 일 앞에 주를 더욱 생각하는 일, 결코 이 일이 저절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조금은 나태하였다가 덜컥, 이런 일을 맞닥뜨리면 얼른 더 주를 바라는 게 지혜였다.

 

하필 또 초딩 중딩 아이들이 한꺼번에 이어서 오는 날이었다. 기운이 없어 만사가 귀찮은데 정신은 또렷한 것이 오히려 맑았다. 오후께 ‘아이’는 직업훈련을 마치고 왔다며 카톡을 주었다. 잘 다독이고 위로하다 있었던 일을 글로 쓰겠다는 아이에게 그러라고 하였다. 채 삼십 분도 안 되어 한 장 이상의 내용을 끌어냈고, 그 어휘나 전개가 ‘아픈 아이’라고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주께서 어찌 이루어가실지 알 수 없으나 아이의 글은 늘 볼 때마다 새로웠다.

 

주가 이루시는 일이란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그리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심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착함-깨끗함’은 ‘모든 것’의 영역에 포함된다. 그게 설령 온전한 자의 눈에 아픈 아이의 그런저런 사정이 딱한 것처럼 여겨지겠으나 오히려 그 반대라. 이미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였다.

 

우리의 착한 행실은 그러므로 우리의 작위적인 노력에 의한 게 아니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그 하나님이 받으심을 받는 자의 자세는 감사였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그럴 수 있는 게 말씀과 기도였다. 그것을 통해 합당한 자로 세우시는 일이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12).”

 

내가 인위적으로 아이들을 어찌할 수 없는 일처럼 또한 무궁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하고 위하여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는 일이다. 몇 백만 원의 교육비를 밀린 아이여도, 해 봐야 늘 그 타령일 것 같은 한심한 경우에도 우리가 주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우리에게 보내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바로 아는 일이다. 같이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내에게 그리 이른 말은 내게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찌 수고하고 애씀으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깨끗함’이 아니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계산적인 생각과 미움과 지겨움과 원망과 남을 향한 비판도 수시로 들어서곤 하지만 이 또한 주께 솔직히 아뢰는 일. 투덜거리고 칭얼대는 아이처럼 툴툴거리면서도 주 앞에서 묵묵할 수 있다면. 주신 날에 주어진 일에 족한 줄 알고 했던 일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면서 어떤 새로운 것을 바라지 않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사는 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1).”

 

결국 이러는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일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려고 그리 되는 게 아니라 그리 되어서 그리하는 일이었으니, 곁에서 보면 맹목적인 것 같고 또는 막연하여서 자기합리와도 닮은 것 같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는 깨끗하게 하셨음으로 깨끗하여진 삶을 사는 거였다. 곧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래서 나는 이미 족하다. 아들이 어느 사이트에 우리 교회나 글방을 어찌 걸어두면 사람들이 검색할 때 찾아오기 쉽고 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고 그리 한다는 것을 됐다고 하였다. 어찌 알려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으나 나는 이것으로 족하였다. 그리 답하였다. 해도 주님이 하실 것이다. 나는 결코 주목 받는 생이고 싶지 않다. 누구의 인정도 어떤 신뢰도 내 것을 삼고 싶지 않다. 아니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나의 나 됨을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선생이 주로 쓰는 표현대로면 ‘더 효율적인’ 또는 친구의 표현대로라면 그래서 ‘더 생산적인’ 하는 따위의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모르겠다 나는. 내게는 그런 마음을 주시지 않는 일이었으니 여느 교회가 또 어떤 목회자가 그리 하는 일들에 대해 나서서 뭐라 할 건 아니지만, 내게는 됐다. 이미 충분하여서 이에 족하다. 족하여서 만족하고 감사하는 가난을 사랑한다. 나의 질병을 선히 여긴다.

 

가정예배로 같이 읽은 말씀에서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 성경의 지렛대가 아닐까? 인생이 제 아무리 무거워도 이를 쳐들어서 쉽게 옮길 수 있는 막대기로써 그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고난 당하였으니 얼른 피하라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이겨내라는 소리가 아니다. 즐거우니 그 즐거움을 만끽하라는 소리도 아니다. 기도와 찬송은 그 모든 일의 주관자를 아는 것.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그러므로 우리의 지혜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 130:1).”

 

그 ‘깊은 곳’ 어느 슬픔의 고통의 고난의 지점에서 나는 주께 부르짖을 수 있는 자이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2).” 누군들 감히 스스로 깨끗하여지겠으며 스스로 착할 수 있겠나?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 주 앞에 깨끗함으로 착함으로 설 수 있는 자 없다. 이를 아는 우리로서는 주를 경외할 따름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 다른 더 좋은 길은 없어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6).” 나의 그 기다림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를 바랄지어다. ‘그에게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나의 죄악에서 나를 속량하시었다. 그러므로 주 앞에 성결하고 다음은 화평하며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