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송축하라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1
때론 밤이다. 왜 그러지? 싶게 느닷없을 때가 있다. 숨 쉬기가 힘들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속은 울렁거리고 어떤 두려움이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응급실로 가야하나 싶은 그러면서도 숨을 진정시키고 마음을 다잡는, 다행히 주의 성전에 서 있다. 속을 달래는 약을 먹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위경련이다. 식은땀으로 금세 옷이 다 젖었다.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어떤 어려움이 또는 고통이 이처럼 느닷없을, ‘보라 밤에’ 나는 어디에 서 있나!
죽으나 사나 주의 성전에 있었다는 데 안도한다. 그런 가운데 여호와를 송축한다는 것, 도우심을 바라고 그 뜻을 구하며 의지하는 일. 실은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음을 들들 볶는 일이야 내가 어찌 달리 고쳐먹을 수 있는 마음도 아니고, 안달복달 저 혼자 끓는 것이라 답답하다. 다행히 아무도 오지 않는 날이었고 나는 가까운 저수지에라도 나갔다 올까 하던 것인데 그럴 수 없었다.
아무런 성과도 보람도 없는 날들 같을 때가 있다. 열매는커녕 새순이라도 돋아나려나 싶은, 너무 막연하고 한심하여서 무력하여지기까지 하는 나의 좌절은 늘 습관적이다. 환경은 언제든 위협적이고, 수고와 노력은 실망을 더할 뿐이고, 신중한 것이 우유부단함으로 이어지고, 성실함이 자괴감을 가져오고, 근면함으로 허무함이 크고, 늘 또 그런 것 같은 몸은 나를 지치게 한다. 오히려 가시덤불을 내고, 돌을 고르고 고르는 데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이어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몸이 어려워 마음도 기운이 없던 하루였다. 다행히 진정제가 들어 속이 조금은 편해졌고, 하루가 길게 느껴져 피로하였다. 그러는 동안 아내는 또 새로 온 어느 아이가 학교에서 똥을 싸고 와서 애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느라 부산한 하루를 보냈다. 아이엄마는 태국사람이고 아빠가 한국인인데 다들 일터에 있어 아이를 건사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느라 우리 부부는 아들에 대해 염려할 새가 없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말씀이 내 안에 계심으로 얼마나 감사한지.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이것마저도 주의 것이라는 데 안도한다. 언제든 밤은 찾아오고, 인생의 밤에 나는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오늘 말씀이 오늘 나의 마음을 다잡게 하신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전 2:17).” 이는 곧 ‘해 아래에서’라는 필연적인 분리를 상기시킨다. 여기의 모든 것은 한계가 있다. 영존의 땅과 다르다. 같은 밤, 보라 밤에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인생의 어두운 밤, 그 ‘해 아래에서’의 필연적인 고초에 대하여, ‘하는 일이 괴로움’이다. 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부자로 사나 비렁뱅이로 사나, 목사로 사나 평신도로 사나, 믿는 사람으로 사나 안 믿는 사람으로 사나.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8).” 그렇듯 ‘해 아래에서’는 모든 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값을 물리고 그 값을 치르며 사는 일에 힘이 겹다. 나는 내 몸 하나로 쩔쩔매고 아내는 주신 날에 맡기신 아이들로 힘에 부친다. 그럼에도 그게 또 할 말이 되어,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신이 나서 낮에 있었던 일을 늘어놓으며, 예배로 하루를 마칠 수 있는 것이 복되었다. 그러니 저마다의 생을 지고 사느라 사는 데 드는 그 값을 물며 ‘해 아래에’ 있으나 주를 바란다. 여호와를 송축함이란 저를 바람이다.
그럼에도 감사한 일이 또 있는데, 나는 침대에 눕자마자 곤하게 잠이 들었다. 안식이다. 주의 사랑이다. 일과 일 사이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맛본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 그 모든 세파에도 깊이 잠드신 예수의 잠과 닮았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7-38).”
상대적으로 이 땅에서는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전 5:8).” 평안을 누릴 수 없다. 열심을 다해 일에 매달림으로 그 인생이 외톨이가 되기 일쑤다. 그러니 어쩔까?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2:24).”
그래서 어제 저녁 같이 읽은 말씀에서 그리 이르신 것이구나.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벧전 5:5).” 그러라고 그러신다.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그러신다. 나는 나의 고달픔 몸뚱이 하나로 그리 이해하였다. 나는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보라 밤에’ 대하여 순간 느닷없는 어두움 앞에 속수무책일 때 이것으로 겸손을 배우게 하시려고, 이를 허리에 동이게 하시려고. 그것은 은혜 안에서 유익한 일이었으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그래서 먼저는 하나님께 대해 복종하게 한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롬 13:5).” 그리하여 예수님보다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바라지 않게 하신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이는 수시로 나를 넘어뜨리는 일이어서 예수보다 나은 삶을 꿈꿀 때 영락없다. 겸손은 사라지고 자신이 주목 받는 생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나를 돌이켜 부르신 이유가 있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그래서 내가 이처럼 진리를 기뻐하고 말씀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구나.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또한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조금은 웃기는 얘기지만 언제 병원에 실려 갈지 몰라 옷차림을 바로하고 행여 누가 없을 때 죽어 그 모습이 흉측하지 않기를 위해 자주자주 정리정돈을 한다. 하다못해 점심을 먹으러 나갈 때도 책상 위를 정돈한다. 이렇게 다시 들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면서, 그것이 의외로 유익할 때가 있다.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그러는 동안 내가 주를 원망하고 고통으로 주를 외면할까 두렵다.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죽고 난 뒤 나의 그 남은 뒷모습이 주께 민망할까봐 마음을 쓴다. 말 그대로 조금 우스운 짓인 걸 알면서도 그런다.
이렇듯 겸손은 모든 게 은혜여야 한다는 걸 알게 한다. 은혜가 아니면 이 또한 어불성설이라.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그래서 말씀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이는 유익하여서 남의 실수도 수용하게 하신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
무엇보다 겸손도 주의 것이라. 주가 그리 내게 두시고 그처럼 여겨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게 겸손이다. 겸손도 때로 그 어느 악보다 악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는 겸손은 오히려 자신의 훈장으로 삼으려 들기 일쑤다. 그래서 겸손은 나의 이 모든 것, 허물과 어눌함과 빙충맞기 이를 데 없는 것까지도 주께 있음을 시인하게 하는 것이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지금 이 순간에도 속이 울렁거리고 어디가 아프고 그래서 힘든 몸을 이끌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안개와 같은 일어어서 주를 바란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15).” 그리 살아야 한다. 겸손은 그 길로 인도한다. 그래서 고통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아프다가도 아파서 두려워하고 주를 바라는 게 간절하여 감사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17).”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보라 또 밤이라 해도 나는 성전에 서 있어서 감사하다. 주를 송축할 수 있음이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2).” 그리하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