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3: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1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실제 이 말씀은 쉽지 않다. 혼자 저절로 그리 깊어질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그래야지, 하고 동의는 할 수 있겠으나 정작 생각은 마음이 기운 곳으로 고이기 마련이다. 자식 생각, 돈 생각, 일구어가는 일에 대한 생각으로 번번이 예수를 생각하는 생각은 흩어지기 일쑤다. 그런데 보면 여러 일들 가운데 아픈 일은 비로소 나를 주장하던 생각이 힘을 잃고 오롯이 깊게 예수를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모든 일들이 고단하겠으나 어디가 아픈 일은 특히 그렇다.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 아이를 오지 말라고 할까 생각하다 그냥 두었다. 며칠간 직업 훈련을 마치고 성경공부를 오는 날이어서 더욱이 오지마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속은 견딜만하였고, 아이의 이런저런 근황을 들었다. 문고리를 만드는 부속품 하나를 조립하는 기술을 배웠고, 추석을 쇠고 남동공단 이쪽 어디로 취업이 될 것 같다며 설명하였다. 일련의 일들을 글로 써보게 하고, 우리는 같이 이어서 시편 21장을 읽고 그 의미를 나누었다.
점심으로는 아이가 죽을 사주었다. 같이 당구도 쳐야 하는데, 아이가 뒤에 앉아 책을 읽다가 돌아갔다. 나는 소파에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속은 메슥거렸다. 인기척에 놀라 눈을 떴을 때 중3 아이가 앞에 서 있었다. 학교 끝나고 그냥 들렀다고 했다. 뭐라 말은 안 해도 아프다는 소리에 그리 마음을 쓴 것 같았다. 차를 한 잔 내주고, 뭐라 일렀을 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열심을 내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자주 그만두겠다는 소릴 하던 것을 말이다.
날 위해 기도해줘. 나는 뜬금없이 말했다. 저는 믿지 않는데요? 아이가 의아하게 물었다. 괜찮아, 너나 나나 우린 원래 스스로는 믿지 못해. 나의 말에 아이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믿음은 주셔야 하는 일이지 내가 그리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어찌 설명해야 할까? 나는 금요일에 초음파검사를 하기로 한 것을 하루 앞당겨 하기로 했고, 여전히 경련이 일어 몸이 불편하다는 걸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아이는 네, 하고 대답을 하였다. 안 믿는 자신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선생의 의도를 알 길 없으나 네, 하고 그러겠다고 대답하였다. 난 네가 언젠가 주일에 나올 거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단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건 어쩌면 막연한 저편 생각의 한 자락이 아니라, 이와 같은 대화에서도 주를 아는 마음으로의 생각이 아닐까? 앞서 아픈 아이가 기도할 때 또는 어떤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을 때 나는 저절로 예수를 생각한다. 무슨 말인지 총명하게 말할 수 없고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주께서 우리의 귀와 눈이 되어주시기를.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중3 아이의 괜한 마음 씀이나 말들에도 나는 저 아이의 마음을 한 뼘도 돌이킬 수 없는 문제이지만 주께서 그리 오늘 우리 곁에 두시는 아이라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13).” 그렇게 그만두고 안 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럼에도 곁에 두시는 아이라면 ‘피차 권면하여,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내게 맡기신 일이면서 동시에 저 아이들로 인해 나를 그리 붙드시는 게 아니겠나.
어디 몸이 아프다는 일은 참 힘들고 고단한 일이지만 건강히 아프지 않고 사는 일이 더 고되고 힘에 겨운 것도 사실이다. 아픈 아이가 쓴 글은 늘 내게 감동을 준다. 자신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장애를 갖은 이들에게 자신의 성실함이 응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심이라는 표현에서 놀랐다. 사람들은 아이를 모자란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모자란 영성을 아이는 오히려 주의 이름으로 돌볼 줄 안다. 이를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고 총명하게 나타내지 못할 뿐인데.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이를 아이의 영혼은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날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한 아이의 횡설수설과 한 아이는 안 믿는 마음인데도 그 가운데 계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영적인 능력이 있다. 사람들은 이를 가시적인 어떤 현물로 바란다. 성과를 보고 남다른 능력을 기대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모두 탕자와 같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의 요구도 그런 것이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2).” 아직 살아계신 아버지를 향해 자기 몫의 현물을 요구한다. 재산이라 하면 대체로 부동산이었을 텐데, 당시 저들에게 땅은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탕자란 ‘제멋대로 군다.’는 뜻보다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는 뜻을 갖는다. 아들은 이를 요구하였고, 아버지는 이를 들어주었다.
대놓고 나는 탕자와 같은 삶이었으나 여전하여서 수시로 바라는 요구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아이의 글을 사랑한다. 말로는 금세 까먹고 하려던 말을 에둘러 길을 잃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찬양이 있다. 경배가 있다. 어찌 다듬어줄 여력이 안 돼 그저 지금은 모아두고 있기만 한데, 주께서 어찌 이루어 가시려는가 하는 기대는 있다. 또한 날 위해 들려주시는 말씀으로도 읽힌다. 중3 아이의 삐딱한 마음가짐도 실제는 그게 아닌데 저도 어쩔 수 없이 기운 운동장에 서 있는 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아버지는 어째서 아들에게 현물로 저의 분깃을 나누어주신 것일까? 그러자면 일정 부분 부동산을 처분하였을 테고, 이는 생명을 도려내는 일과 같은 것이었을 텐데. 꾸짖고 야단 쳐 저를 감옥에 가두었어도 됐을 텐데. 나는 여전히 내 안에 있는 어떤 요구, 그 기도의 의미를 생각하였다.
막연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과 어디가 아파 아픈 몸을 건사하는 일에 있어서 같은 점은, 나로서는 모두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말이다. 중3 아이 하나 그 마음을 돌이킬 수 없는 게 나다. 아픈 아이를 내가 어찌 총명하게 할 수 있겠나. 속은 울렁거리고 숨쉬기가 곤란한 몸을 내가 어찌 낫게 할까. 그런 가운데 나의 요구란 나의 분깃을 바라듯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하고 당장 어떻게 좀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었으니!
그럼 또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부동산을 처분하듯, 생명의 일부를 떼어내듯 자기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익히 잘 아시는 그 아버지를 빗대어 ‘두 아들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었다. 그 죄를 우리 앞으로 돌리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응보하시는 아버지가 아니다. 전혀 다른 결이지만 아버지의 씀씀이나 아들의 씀씀이가 같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고, 아들은 자신을 위해 아버지의 것을 모두 탕진하였다. 그런데 저의 깨달음은 아들로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종으로서도 아니라, 품꾼으로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품꾼은 집 안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 집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결국 그 지경에서도 저는 최소한 종으로나마 그 집에 들어갈 생각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의 허기를 채우려는 이기적인 깨달음이 한계였다. 우리가 주를 바라는 마음도 그런 경우가 얼마나 흔한지.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아버지로 영접한다고 하면서 실은 하나님보다 그의 은혜를, 사랑을,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바랄 뿐 정작 그 집에 함께 들어가기를 주저한다.
나갈 때도 그러했던 이가 돌아오면서도 달라진 게 없었다. 결국은 둘 다 탕자다.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온 것 같으나 ‘품꾼으로’ 바랐다. 은혜로 보살핌을 구하면서 아버지께로는 아니다. 우리는 끝까지 그런다. 결국 아버지의 무궁하신 은총이 아니면 나갈 때나 돌아올 때나 별반 우리는 다를 게 없는 죄인이다. 내가 저 아이들을 생각하는 일이나 저 아이들이 나를 따르고 좋아하는 일이나, 결국 예수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다.
이에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6).”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아무 쓸모없는 존재이다. 아버지가 달려 나와 맞아주지 않으시면 둘째 아들이나 큰 아들이나, 집 밖에 있던 둘째나 집 안에 있던 맏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나는 어디가 아파서 아픈 일을 하며 주를 바란다. 연약한 이 육신으로도 주께 쓰임 받을 수 있다면, 하고 바랄 때 나의 바람은 집 안에 든 종으로도 아니고 품꾼으로 일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소유격 조사 ‘의’를 붙여 그 사랑을, 은총을, 긍휼과 자비하심만을 바라고 살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정작 아버지 집 인근 어디에서 은혜만 받길 바라는 마음으로는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고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곧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