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히브리서 5:4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시편 138:2
예의가 바르다는 건 그만큼 눈치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가 마음 쓰는 게 종종 주눅 든 것 같아 되레 마음이 쓰인다. 유난히 횡설수설 말이 길었고 어떤 불안을 호소하였다. 먼저 있었던 일을 글로 쓰게 하였다. 짧지만 진득하니 집중력이 좋았다. 아이가 기도하고 같이 성경을 읽었다. 붓 펜과 노트를 새로 사주었다. 시편 23편을 정서하였다. 같이 내려가 점심을 먹는데 나는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다. 아이가 다시 올라와 한참 공부를 하다 갔다. 그러는 동안 하늘이 맑게 개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아이의 긴 말에 귀를 기울이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부쩍 다시 게임에 빠져드는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혼자 있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말로는 어찌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다 보면 필리핀에 혼자 떨어져 생활하는 아들 녀석과 중첩되어 마음이 아리다. 살고 싶은 삶을 자기 위주로 사는 게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오늘 날의 문화가 두렵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려드는 가치관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말이다.
아침마다 건너와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노인은 때로 지겹다. 그의 완고함이 오늘날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예로 보여주는 것 같다. 자기 위주의 판단과 가치관은 때로 가차 없어서 누구에 대해, 무엇에 대해 말하는 걸 듣고 있노라면 무서운 생각도 든다. 나도 다를 게 없어서 말이다. 할 말이 없는데 왜 이런 구구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것도 사역이려니. 저는 그래도 나를 목사라고 여겨 이런저런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겠으니.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오늘 말씀이 나의 일에 대하여 새삼 깨닫게 하시는 것 같다. 일상에서 그와 같은 영감을 잃지 않고 내게 붙이시는 이들을 직시하는 것. 저들의 말과 행동은 물론 내게 빚어지는 여러 일들 가운데서 충족함을 느끼는 것. 그래서 충실하게 임할 수 있는 자세를 말씀은 늘 제공하신다.
곧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시 138:2).” 주께서 내게 두시는 말씀이다. 복음이란 생활의 축을 고정하는 일이다. 때론 전혀 관련이 없게 펼쳐지는 현실이 어렵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주의 말씀으로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 내 마음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저들을 사랑하고 위하고 대할 수 있는 일에서 말씀은 민감하게 작용한다.
노인의 구구한 자기 이야기나 아이의 엉겨버린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나는 기어이 주를 바라고 말씀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어떤 조언을 한들. 그게 아니라 우선 그냥 그런 존재로 거기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일이겠다. 꼭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는 게 의무가 아닌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삶의 균형이 깨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냥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으로는 이야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래서 뒤틀려버린 현실이 이야기의 단초가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다. 왜 그 이야기가 시작될 수밖에 없었는지, 사람이 타락을 했고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본 궤도에 오르는 이야기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 하여 사람으로 오시고 죄의 값을 치러 구원을 이루시는 이야기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결코 거저 된 내가 아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이와 같은 부르심의 존귀가 내가 스스로 취한 게 아니다. 원하여 여기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이 사람의 이런 구구한 말을 왜 듣고 있어야 하나, 싶은. 아이의 말도 안 되는 말을 조각처럼 이어가며 들어주는 일이라니. 같이 성경을 읽고 손을 잡고 기도를 하는 것도 그때뿐인 것 같아 회의도 들지만. 모든 이야기는 이와 같이 균형이 깨진 사람들의 것이다. 그저 ‘빨간 모자 소녀’가 할머니께 음식을 가져다주고 서로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면 더는 무슨 이야기가 필요하겠나. 그럴 수 없었던 사건이 발생하고 균형이 깨져 위기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이야기다.
성경을 우리에게 말씀으로 주신 이유다. 이 이야기가 없었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의 문제를 가늠할까? 어떤 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까? 가치관은 점점 자기 위주로 바뀌면서 여성으로 태어났다가 남성으로의 삶을 지향하고, 일찍이 커밍아웃을 한 조모의 지지와 결혼에 앞서 동거에서 아이를 가졌고, 실은 그 아이가 시동생의 아이라는 것. 그래서 결국 미성년자인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며 성전환수술에 동의하고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면서 끝나는, 한 편의 영화 같은.
혼탁한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게 대체로 영화의 소재로 쓰인다. 소설의 모든 가닥이 혼재다. 균형이 깨진 우리 이야기다. 그래서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말 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얼결에 결혼을 했고. 그 시대엔 다들 그랬다는 듯 네 명의 자식을 두고도 새살림을 차렸고. 지독한 가난으로 어머니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사창가로 들어갔다. 사남매 중 셋째로 지독하게 살아내어 몇 채의 집을 가지고 있고, 미국에서 성공한 막내 여동생이 한 달 간 귀국하여 함께 지내고 있는, 오늘 이야기.
어떤 인생이든 조금만 들춰보면 파란만장하지 않은 게 있던가. 온통 이야기다. 이런 말을 목사님 앞이니까 하지 내가 내 자식들한테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는 노인의 변명이 서럽게 들린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그런 가운데 성경이 나에게 일갈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뭐? 그게 자랑인지 구차한 변명인지 알 수 없으나, 모든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빠지면 어김없이 첫째 되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왜 이처럼 간곡하신가? 처음 사람의 범죄는 하나님 대신 자신을 신으로 삼은 것이다. 그것이 이어져 오늘 날에도 여전한 것이다. 저마다 자신이 이상과 꿈, 정체성을 좇아 산다.
심지어 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쓰시는 이의 합당한 자리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자리, 그 위치, 역할을 좇음으로 신앙에도 고도의 우상숭배가 자행되는 것은 아닐까? 버젓이 주를 위해 목사로 교사로 섬긴다고 섬기면서도 말이다. 어제는 그 지겨움이 나를 깨닫게 하였다. 또 같은 말을 듣듯 저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왜 이런 소릴 듣고 앉아 있어야 하나, 싶어서. 아이의 말도 안 되는 말들은 말 그대로 병적인 것이라 때론 더욱 피곤하여서 짜증이 날 때도 있어서.
속은 울렁거리고 좀 누워서 나 몰라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중3 아이는 토요일에도 오겠다고 하여 오전 일찍 약속을 하고. 아내는 똥 싸는 아이 손을 잡고 학교까지 가서 두고 온 교육계획안을 함께 가져오는.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 두신 주의 일이 아니겠나? 나는 내 것이 아니다. 값 주고 사신 이의 것이다. 그런즉 이 몸으로 주께 영광을 돌린다는 일은 묵묵히 또 무던하여서 ‘왜?’라는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참아내는 일.
결국 이 복음,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다. 우리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찌 일하시고 또한 이루어 가시는가를, 우리의 깨어진 균형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는 거였다. 이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나는 이 말씀을 사랑한다. 때론 어이없고 답답하고 한심하기까지 한 이 조각난 하루 같은 것도 다 쓰임에 맡게 다루시고 이루고 계시다는 것.
고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날마다 또 매순간! 그래서 나는 기를 쓰고 묵상을 글로 쓴다.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며 주를 바란다. 나의 기록은 나를 바로 세운다. 다시 읽고 또 돌아볼 수 있어 귀하다. 가끔은 하루에 이 한 가지 일만 제대로 해도 귀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기도 중에 이처럼 묵상 글을 쓸 때만큼만 살게 하옵소서, 빈다. 그 내용에 담긴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만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고 바란다.
아,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씀에 의거하여 사셨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5-6).”
그러므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7).” 하여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8-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