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전봉석 2018. 9. 24. 07:26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7:8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시편 140:12

 

 

20년 목회 생활을 석 달 남겨놓고 기어이 목사는 회중 앞에서 교회를 사임할 것을 공표하였다. 부목으로 있는 동생은 그 일로 당장 추석 명절날에도 새벽예배를 지켜야 해서 이번 추석에는 못 올 지도 모른다고 연락하였다. 그러니 저는 새벽예배 수요예배 한 번 부교역자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감당하였던 목회였던 것이다. 어찌됐든 그 구차한 사연에 대해서는 내가 열거할 게 없다. 다만 슬프다.

 

교회를 개척한 장로들이 주축이 되어 이런저런 구설과 감언으로 끝내 목사를 굴복시킨 것이다. 20년 목회면 교회법으로도 저의 남은 생애를 교회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니 막판에는 그래서 그렇게 악랄했던 모양이었다. 사람들 참 지긋지긋하다. 어찌됐든 저의 울분은 차치하고 그 자녀들의 심정이 이입되는 것 같아 더욱 속상하였다.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나의 아버지와 그 목회 현장에 늘 함께 하였던 어머니를 보며 그래서, 그래도 감사하였다.

 

어릴 적 내 기억속의 사람들이란 성도라는 표현이 무색하였다. 좋을 땐 간 쓸깨 다 빼줄 것처럼 굴던 이들이 돌아서면 가장 매서웠다. 동갑내기 친구의 아버지였고 전 교회 장로였던 이가 아버지와 같이 나와 개척을 시작했던 게 내 나이 중3 때였다. 저가 얼마를 어떻게 헌금하여 시작한 것인지 그 내막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어느 시점에서 저는 그 돈을 도로 내어놓으라 하며 교회를 떠났다. 내 기억으로 어찌어찌해서 그 돈을 마련해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싫어하였다. 특히 교회에 열심인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사람이 순순하다는 말처럼 어리석은 표현도 없다. 나는 막내 동생의 사연을 접할 때마다 결코 어느 쪽에서 서지 말고, 어떤 경우에도 주의 종과 척을 지지 말 것을 당부하였었다. 덕분에 같이 구설수에 오르고 이런저런 매도와 음해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일 거였다. 명절을 앞둔 주일에 결국 그 교회는 그렇듯 일을 냈구나. 혼자 마음이 착잡하였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주일 날 아버지가 증거한 본문의 말씀이다. 마치 오후에 벌어질 일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본문은 시의적절하였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보다 모순적인 게 또 있을까? 이 어려운 말씀 앞에 나는 몸서리친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일은 세상을 바라지 않는 일이기도 한 것이었으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16).” 그래서 나는 사람의 열심을 믿지 않는다. 기분은 실제가 아니다. 느낌은 늘 우리를 속인다. 어떤 확신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 같다. 입 안의 혀처럼 굴던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하는 법이다. 자초지종을 떠나 나는 그 저 교회의 문제가 이 세상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7).” 이와 같은 말씀이 위로로 다가온다. 이 세상도, 우리의 정욕도 지나간다. 그처럼 기를 쓰고 죽어라 덤볐던 의도 분투도 사투도 나름의 명분도 모두 지나간다. 결론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인데 그 일은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어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 데 도구로 사용될 뿐인 것이 이 세상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믿는 자의 영생을 얻게 하심’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모태와 같아서 그 귀한 자궁 속은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의 소중함이다. 이를 사랑하여 여전히 그 안에 머물려 한다거나 도로 그 속으로 들어가려하는 일은 모두 어리석다. 결국 우리의 신령한 복은 이 세상에 있는 게 아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모두 실현되는 날 이 세상은 다만 없어질 것에 불과하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이를 두고 너무 막연하여서 어떤 이들은 너무 더디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그럴 리 없을 것이라고 하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8).”

 

하나님의 시공간 안에서 아브라함의 시간과 오늘의 시간은 하나일 뿐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시간은 시간의 저항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믿는 자들의 권세는 기다림이다. 참음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 왜 저들은 기어이 담임 목사를 끌어내리려 했을까? 그러듯 서너 명의 목사를 갈아치우며 저들이 얻는 게 무얼까?

 

나는 생각이 많았고, 나의 생각은 슬펐다. 눈에 띄게 뵐 때마다 늙어가는 부모의 세월이 슬펐고, 그에 따른 운신의 어려움이 슬펐고, 슬퍼하는 나의 슬픔이 슬펐다. 나는 내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며 살았던 사람인가를 잘 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여전하였을 나의 됨됨이를 또한 경멸한다. 그리 어울려 함께 즐거움을 탐닉했던 친구들과 선생을 생각하면 아득하고 아찔하여 슬프다. 저들의 여전한 모습이 말이다. 이제 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10).” 누구보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다가 보기 좋게 배신하고 돌아섰던 이의 절규로써 베드로의 증거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의 확신이다. 중간에서 힘들어하는 동생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맨몸으로 맞서왔을 어느 늙은 목사의 비애를 알 것 같아서 슬펐다. 왜 그처럼 억척스럽게 혼자서 모든 공적인 예배 설교를 맡았었는지 알겠다.

 

누구는 열심이라 하고 누구는 고집이라 하는데 나는 그것이 저가 그 목회 현장에서 견딜 수 있던 유일한 힘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몇 명 안 나오는 새벽예배에도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이 포진하는 금요 철야예배에서도 저는 결국 말씀으로 버티고 말씀으로 마주섰던 게 아닐까? 나는 내 아버지의 목회 현장을 떠올리며 철없는 아이처럼 되뇌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정말 싫어요.’ 그 싫은 이유대로 고스란히 내가 살아왔던 것이고, 그런 나를 끝내 버려두지 않으셨던 주의 사랑이 오늘에 나를 여기 있게 하시는 것인데도 나는 철딱서니 없이 속상해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말씀으로 말씀만 붙드는 일이겠으니.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히 7:8).” 엄연히 그 날은 도래할 것이고 어느 훗날 누구는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며, “내가 알거니와 (이 세상에서)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시 140:12).”

 

나는 이와 같은 계명을 사랑한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3).” 감사할 줄 아는 게 복이었으니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 7:28).”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육신으로는 점점 쇠약해져가는 부모의 늙음이 슬픔이 어느새 곁에 앉아 같이 세상을 논할 수 있는 나이를 먹은 뒤에야 비로소 나로 하여금 감사를 조금 배우는가보다.

 

그때마다 교회를 떠나야 했고, 저들로부터 배신을 당해야 했으며, 그처럼 입 안의 혀처럼 굴던 이들과 결별한 후에야 비로소 오롯이 하나님만을 바라고 말씀 만을 앞에 두고 앉을 수 있는 오늘의 세월이 값지고 소중한 것이 아니겠나. 이 세상은 결국 다 지나가는 것. 그러니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은 무얼까?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말씀 앞에 경배를.

 

부디 나의 자식들과 내 곁에 두시는 이들에게 사명을 갖고 전하여야 할 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우리를 창세 전, 그 영원 전부터 택하사 부르신 이유였다. 이 세상을 두신 목적이었고, 이로써 주가 이루실 약속이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들로 찬송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시 140:1).” 이에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