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18. 9. 28. 07:04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6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15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대체 이런 아이를 내가 어쩔 수 있겠나싶을 정도로 난감할 때, 오늘 아침 말씀은 ‘믿음으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성경의 원리를 다시금 일깨우신다. 중1 아이 둘과 수업을 하다, 한 아이는 엄마의 과잉보호로 추석연휴 내내 집에만 있었다 하였고, 한 아이는 우리 이야기와 상관없이 자기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자 엎어져 잠이 들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으니까 아빠와 헤어진 지 족히 7, 8년은 넘는 셈이다. 기억도 없고 더 어릴 적 기억으로는 좋은 게 없다고 아이는 허탈하게 말하였다. 이제 마흔.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산 세월만큼씩 아이엄마는 세상을 경계하였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곁에 두려하였다. 동네 밖을 나가본 적이 없어요. 아이는 덤덤하게 말했다. 안 힘들어? 나의 물음은 어눌하였다. 뭐, 그냥. 좀 답답하긴 한데 엄마를 이해해요. 아이의 어른스러움이 나는 안쓰러웠다.

 

엎어져 자는 아이는 포항에 남자 친구가 있고, 필리핀에 가족여행으로 놀러갔다가 만났고, 얼마 전 100일이었고, 하는 온통 남자 이야기다. 공부는 작파한 아이처럼 굴었고 예쁘장한 얼굴을 치장하는 데 온 신경을 써댔다. 주일에 어디 교회는 나간다고 하니 다행이다 싶다가도 엄마 아빠 모두 다녔었는데 지금은 다들 안 다닌단다는 말로 미뤄 짐작이 되었다. 옆에 있는 아이와는 상대적으로 배부른 투정 같아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한들, 어떤 관심을 기울인들, 어떻게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은 아이들을 두고 나는 난감하였다. 그럼에도 주가 보내시는 일이라. 믿음으로, 이 믿음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데서 출발해야 할 거였다. 것도 그럴 것이 안 믿는 사람으로는 거저 주시는 은혜의 구원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이 죄인이며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곧 예수의 보혈과 섬김으로 구원을 입는다는 데 부끄러워한다.

 

그랬던 나에게,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 1:6).” 오늘 내게 맡기시는 일을 상기시킨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은 그러했던 믿음의 열조를 나열하며 저들이 ‘믿음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기본 명제를 일깨우신다. 곧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저 아이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아무리 나를 난감하게 한다 해도, ‘믿음으로’ 저를 보내신 이를 바라는 일이다.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지로다(대하 19:11).” 곧 아이를 보고 하는 일도 아니고, 내 안에 이는 어떤 안쓰러움으로 하는 일도 아닐 거였다. 왜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지 알게 하신다. 우리에게 뿐 아니라 안 믿는 모든 이에게도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내가 나서서 어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의 그런저런 처지도, 내 안에 이는 조잡한 안타까움도.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성품이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의다. 내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거기뿐이다.

 

하여 나는 이 앎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런 아이들’을 대해야 하는 ‘이런 정도’의 사람일지언정 이를 들어 구원을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의다. 동생과 통화를 하고 여전히 그 타령인 그 교회의 실정과 사람들의 회유와 공갈과 온갖 음해에 대하여 부디 의연하기를. 어차피 원로장로파니 물러난 목사파니 그 어느 쪽도 아닌 다음에는 주만 바라자. 힘써 주만 의지하자. 말씀 붙들고 말씀을 무기로 승부하자. 달리 더 좋은 수가 없었다.

 

사람들 참, 얼마나 악랄한가. 행여 설교 중에 뭐라 할까 하여 이리저리 애쓰는 저들의 가증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러니 뭐라 한들 가만히 떠나는 게 상책이겠으나, 그러지 못하게 하나님이 붙들어 맨 곳이니 견디는 수밖에. 견디는 것만으로도 큰 일이라. 뭘 꼭 하려 할 것도 없고 굳이 해서도 안 될 상황이라.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우리는 이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들 사이, 그 세상이란 게 다 그 모양인 것을. 교회인들 다를까? 그런 와중에도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우리는 주만 바라봄이다. 이 또한 주가 주시는 능력으로 이를 수 있는 의라.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 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어쩌겠나.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우리는 또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었으니, 누군 저 사람들처럼 엉기고 붙어 싸울 줄 모르겠나? 교회 문제를 세상 법으로 풀려 하고, 하나님의 일을 자신들의 논리로 다투려하니 별 수 있겠나?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우리가 다른 점은 믿음뿐이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그 능력으로 의롭다 하실 일에 대하여. 묵묵히 또 무던하게. 같은 말을 또 하고, 또 그 타령인 아이를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위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내게 두신 일이겠다. 싫증나고 신물이 올라오는 일이지만 또 그 소릴 들어줘야 하고 그런 심정으로 다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일이어서. 누가 들으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복음이다. 오늘에 내가 있을 수 있는 은혜의 근거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방탕함과 도덕적인 해이함과 자기애와 그 집착이 빚어내는 현실이라. 아이엄마가 어쩌자고 저러는가 싶으면 영락없다. 아이는 어째서 저러나 싶으면 것도 가없다. 아니 어찌 된 엄마가 한 시간도 못 기다려주고 자기들끼리 저녁을 먹으러 갔을까? 중3 아이는 서러움에 꺼이꺼이 울었다. 왜 아이가 그처럼 밖에서 외톨이인가 알겠다. 아이는 엄마를 불신하고 엄마는 아이를 무시한다. 서로의 반목과 불화는 하나님과의 불편한 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결국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를 붙들고 아이를 대해야지, 저의 사연을 내가 어찌 대신 짊어질 수 있겠나? 세상이 어떻든지, 그 날의 모든 형편과 사정이 어떠하든지, 결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38).” 어떠한 경우에 처하든지,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8).”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나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어떤 보상도 없고 또는 우리도 그 약속을 받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것.

 

내가 바라는 그 이상의 결말을 준비하신 하나님. 예상하고 생각하고 바라는 정도로는 감히 상상도 추측도 할 수 없는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로 하여금 저 아이들의 온전함이 이루어질 수 있다! 수업을 조금 일찍 끝낸 아내가 교회로 나와 같이 예배를 드렸다. 교회와 교회를 이웃하고 있는 사무실들과 곁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살아계심이 나타나기를. 아이들과 그 가정의 안 믿는 부모들을 위하여도 기도하였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시 144:1).” 내 손을 가르쳐, 손가락을 가르쳐 싸우게 하실 것을 믿는다. 결국은,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