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으키시는도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2:3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시편 145:14
아이가 노랗게 질린 얼굴로 들어왔다. 카드를 잃어버렸어요. 가방을 뒤지고 주머니를 까뒤집으며 울먹거렸다. 같이 아이의 가방과 옷섶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장애인복지카트를 잃어버린 게 벌써 두 번째였다. 그래서 지갑식 핸드폰케이스를 구해주었는데, 거기에 꽂았는지 주머니에 넣었는지 아이는 당황하여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덩달아 가슴이 옥죄는 듯하였다. 뭐라 이르니 애가 주눅이 들어 멀뚱히 서 있는데 그 모습이 또 안쓰러워 그만두었다.
어제 무엇을 하였는지, 형이 추석 연휴 동안에 집에 와 있어서 좋았는지 무엇을 같이 하였는지 아이는 기억하지 못했다. 전날에 일기를 쓰게 하였으나 긴 추석연휴기간에 어디 공원에 갔던 일만 기억하였다. 안타까움인지 답답함인지 나를 옥죄고 드는 마음이 어려워 아이 몰래 안정제를 한 알 삼켰다. 어르고 달래 괜찮다고 하여, 우리는 시편 24편을 읽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어떻게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지경에서 참고 견딜 수 있었을까? 감히 나의 경우를 빗대어 말하기는 송구할 따름이나,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 오늘 말씀은 ‘허다한 증인들’이 내 앞에 있음을 알게 하신다.
저들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렸다. 지고 이고 안고 살아야 하는 자기 무게의 생이 가없다. 누구는 사람으로 시달리고, 누구는 물질로 인해 시달리고, 누구는 육신의 질병으로 시달리고, 누구는 이를 돌보느라 시달린다. 누구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느라 시달리고, 누구는 강박적으로 옳은 길을 찾아 시달린다. 그 모든 ‘무거운 것’을 나는 ‘사는 데 드는 비용’이라 생각한다. 그만한 수고와 애씀이 따른다. 지불하며 살아야 하는, ‘이마의 땀방울’이 무겁다. 이로써 ‘얽매이기 쉬운 죄’가 이것이니 측은지심이나 자기애나 열등감, 초조함, 자격지심이 모두 같다.
스스로 어찌 해보려고 하는 마음이다. 그러지 못해 안달이 이는 게 우리의 감정이다. 기분은 결코 정직하지 못하다. 오래가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늘 우리 자신을 주장한다. 당장을 쥐고 흔든다. 이를 병적으로 예민하게 느끼는 것이 아이의 조울증이고 나의 불안증이다. 이를 다스리기 위해 복용하는 약물이 아이의 지능을 감퇴시킨다. 기억력은 저하되고 감정은 오락가락한다. 이제 약물이 아니면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라 조현병은 무섭다.
의학적으로 그렇다는 경우 이처럼 약물치료를 병행하면 되지만, 자신은 나은 줄 알고 안 그런 척 하면서 사는 세상이라 다들 미쳐 날뛰는 건 더하다. 홀로 하는 VJ 일인방송이 보다 자극적이고 과장된 짓거리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이를 더욱 부추겨, 먹는 것 싸는 것 죽는 것까지 방송을 하는 시대다. 도로 한복판에서 보복운전은 다반사며 이에 따른 신경질은 자신보다 약한 가족에게, 을에게, 병에게, 정에게 퍼붓기 일쑤다. 그래놓고는 서로가 정상이라고 하니 뭐라 한들!
나는 아이가 성경을 필사하는 동안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얽매이기 쉬운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어찌 단 하루를 더 살까? 이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 오늘 말씀은 그 답을 제시한다.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죄인들이 자기에게 거역한 것을 참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그리하셨다. 당장은 그러해도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도 참으셨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이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오늘 나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말씀으로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래도 감사한 건 아이가 점심을 같이 먹고 남아서 책을 읽고 영어공부를 하다 가는 걸 좋아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혼자 낄낄 웃으며 중얼거리며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다. 저 아이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 그 집중이 허무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이제 뭐하죠? 하고 되묻는 아이에게 집에 들렀다가 신분증 갖고 동사무소에 가서 복지카드분실 신고를 하고, 강아지 산책시키고, 보드 타고… 그 일정을 말해주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러니 어미의 심정은 오죽할까.
아이가 돌아가고 설교원고를 고쳤다. 지난번에 준비한 것인데, 아버지가 오시고 추석을 쇠는 바람에 거저 얻은 듯하였다. 다시 읽으며 다듬다 그러는 동안 주셨던 말씀을 더하다보니 새로 쓰는 폭이 되었다. 그러고 있는데 아이의 문자가 들어왔고, 새로 만드는데 한 달이 걸린다는 말에 아이를 다독이었다. 힘내, 스트레스 받지 말고, 대신 주일 날 맛있는 거 먹자. 하고 아이에게 카톡을 보내는데 울컥, 하였다. 주님의 마음이 늘 이러하신 게 아닌가!
나는 요즘 뭐만 바라면 그게 생긴다. 어떤 옷을 갖고 싶어 하면 그게 생기고, 독서대를 하나 새로 사야 할까 했더니 동생이 보내오고. 마치 거짓말처럼, 그 어떤 소소한 위로가 ‘힘내고, 주일 날 맛있는 거 먹자.’ 하고 위로하시는 것 같다. 그렇듯 주가 우리를 보호하신다. 여러 증인이 그리 고백하고 있다. 먼저는 바울의 증언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야고보도 말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베드로도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주가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다윗이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시 145:14).” 앞서 요셉의 증언이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이를 알게 하시는 이가 우리로 ‘얽매이기 쉬운 죄’로부터 보호하시는 것이다.
일일이 더 찾아보면 앞서간 믿음의 허다한 증인들 가운데 누군들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다들 안다. 지금 내가 아는 확신을 저들도 가졌다. 비록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나야말로 그러하고 그러해서 내가 저 아이로 인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게 주의 긍휼하심이었으니.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11).” 더욱 주를 바랄 뿐이라. 주는 오늘도 나의 모든 고난에 동참하신다. 자비로 보호하신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9).” 부디 나의 이 사소한 날들의 쓸모없는 기록들 가운데서도 주의 은혜가 증거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