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전봉석 2018. 10. 5. 07:06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야고보서 5:2-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1-2

 

 

‘갖다 먹어버리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때로 무모하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계 10:9).” 가정예배로 같이 읽는 말씀이 다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 막연하고 무모함이 우리 영혼을 살린다. 주 앞에 돌아왔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말씀이었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10).”

 

묵상의 기본 반응은 입에선 단데 배에선 쓰다. 읽을 땐 근사한데 그리 살려고 들면 부대끼는 게 너무 많다. 누가 어찌 말씀대로만 살 수 있겠나? 하여 적당한 타협을 바라는데 ‘배에서는 쓰다.’ 그럼에도 ‘갖다 먹어버리라.’ 하여 ‘갖다 먹어버리니’ 읊조리며 웅얼거리던 즐거움이 으르렁거리며 구구거림이 되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복 있는 자의 기본자세이다. 갖다 먹어버리는 사람들이다.

 

억지로라도 그리 해야 한다. 종종 주사를 맞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날카로운 바늘로 살을 뚫고 혈관에 이르거나 근육에 고루 퍼져야 할 필요가 있다. 어쩌다 우리의 살갗은 단단히 굳어져 그리 스며 들기를 바라는 데는 한계가 있다. 모처럼 초딩 아이들이 와서 글을 썼다. 이제 아이들은 잠언을 한 장씩 읽고, 그 가운데 한 구절을 마음에 담아 옮기고, 이를 이해한대로 설명하고, 그에 따른 일기를 한 편씩 쓴다. 오자마자 성경을 찾고 순순히 그리 행하는 모습이 고마웠다.

 

별 수 없다. 말씀이 우리 안에 고루 퍼지기까지 그저 때론 주야로 묵상하는 수밖에. 그게 무슨 소린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두고보면 알 일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묵상이란 이처럼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은 것이다. 놓치지 않는 게 이기는 것이다. 주의 강림이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소리다. 한 아이는 그 엄마도 포기한 아이다. 이제 곧 6학년인데 몸도 약하고 마음도 여리고 공부는 바닥이며 자기고집은 보통이 아니다. 아무도 그 앨 못 건드린다. 처음엔 악을 쓰고 울어버리고 토라져 말도 않더니 이제는 제법 의젓하게 앉아 잠언을 읽는다. 자신이 옮겨 적은 구절을 무슨 뜻인가 하고 묻는다.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무모함을 사랑한다. 오늘 말씀은 말세의 때에 관한 경고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2-3).” 오늘을 살면서 돈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잘 안다. 한데 그 재물을 말세에 쌓음으로 그 마음에 말씀을 바랄 자리가 없다. 악착같이 모아도 연실 또 줄줄 새는 게 또 삶이라. 사는 데 드는 비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이들 가정의 젊은 부모들은 맞벌이를 하느라 애를 돌보지 못하고 돈 때문에 으르렁거리다 이혼을 하거나 별거를 하고 형제간에 등을 돌리고 산다. 아이들을 돈으로 입막음을 하듯 돈으로 길들여진 아이들은 그 위세가 보통이 아니다. 어제도 한 녀석이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는지 다들 그 애 앞에서 공손하였다. 하물며 어른들의 세계일까? 결국은 자기 살을 먹음이다. 말세에 쌓은 재물은 그러하다. 벌어도 벌어도 끝이 없고 모아도 모아도 늘 그 타령이니, 사는 데 정신이 팔려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 38:14).” 고로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단순한 고상함이 아니다. 시간이 남아 심심풀이로 하는 일이 아니다.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는 앙망함이다.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나는 이를 놓치면 죽을 것처럼 으르렁거린다. 무엇에도 빼앗길 수 없는 으르렁거림이고, 필사적으로 구하는 구구거림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맛을 알았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가진 게 많은 자는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이미 넉넉하다 여겨서 말세의 때에 아쉬울 게 없는 것이다. 말세의 재물은 그처럼 우리를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게 한다. 굳이 여호와의 선하심이 필요 없고, 그것마저도 보기 좋게 벽에 걸어두는 십자가 정도이면 족한 것이다. 신앙이 사치가 된 세상에서 말씀을 붙들고 으르렁거림은 생존의 문제다.

 

이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괜히 복이 아니다. 사람 다 자기고집대로 산다. 별 수 없다. 나는 여지껏 자기를 이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늘 온화하여 모든 것을 양보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저 또한 그것이 고집이라. 어쩌겠나? 생긴 대로 산다는 말처럼 자기고집대로 살다 주 앞에 서는 수밖에.

 

그래서 주사를 맞을 때 살을 뚫고 들어가는 주사바늘이 나는 때로 경이롭다. 따끔합니다, 하고 간호사가 팔에 독감예방주사를 찔렀다. 따끔하더니 묵지근하게 퍼지는 약물이 느껴졌다. 고작 3, 4초 걸렸을까? 그것이 내 몸을 돌아 어디로 퍼지고 스며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나는 사실 모른다. 아이들이 앉아 소리 내어 잠언 한 장을 읽는다. 4학년 녀석은 아직도 떠듬거리며 읽는다. 고작 3, 4분쯤 걸렸을까? 나는 아이들이 입안으로 웅얼거리듯 읽은 저 말씀이 어떻게 우리 안에 스며지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복이 있다. 말씀을 읽는 일에서 말이다. 이로써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어쩌다 사업을 운운하며 같이 무얼 도모하면서 아들 녀석은 뭐라 하면 그게 왜 나쁜가? 반항하듯 되묻는다. 악인들의 꾀를 융통성이라 하고, 죄인들의 길을 성공의 지름길로 알며, 오만한 자의 자리를 부러워한다. 그리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말세의 재물은 그처럼 우리를 삼키는 것이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 5:1).” 부자가 되는 게 다들 생의 목표인 세상에서 오늘 말씀은 다소 생뚱맞기까지 하다. 그게 왜 나빠? 하고 되묻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2-3).” 이와 같은 말씀을 으르렁거리며 물고 뜯어 갖다가 먹어버릴 청춘이 몇이나 될까?

 

그냥 그렇다는 소리로 듣고 마는 정도이면 족한 것이다. 애들 사이에서도 돈 많은 게 장사다. 아무도 당해내지 못한다. 수업이 끝나고 다들 그 아이 곁에 붙어서 돌아갔다. 어디서 무슨 행세를 하는지, 아내는 아이들이 몇 시에 갔는지 왜들 전화를 받지 않아서 엄마들이 찾고 있는지 성화였다. 오락실에라도 간 것일까? 돈이 있으면 딴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심심해서 카지노에 들락거리고 술을 짝으로 사다놓고 밤낮으로 홀짝거린다는 누구에 대한 말을 듣고 그 영혼이 어느 지경인가 짐작이 되었다.

 

있으면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이 말세의 재물이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5).” 몇 십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고 몇 백만 원짜리 가방을 들고 입고 있는 옷이며 손목에 찬 시계가 모두 필요 이상의 값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살육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하였으니,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1).” 오늘 말씀이 아프게 들린다.

 

부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살게 하시기를. 오늘 말씀은 그 방법을 일러주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7-8).” 다만 나는 아이들에게 말씀을 읽힐 뿐이다. 이를 옮겨 적게 한다. 그 의미를 되새기게도 한다. 이를 가져다 자기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 영혼에 고루 퍼져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그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우리의 뿌리는 시냇가로 뻗어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이 형통할 따름이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