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전봉석 2018. 10. 7. 07:39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베드로전서 2:3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시편 3:4

 

 

곧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말씀을 사모함으로 모든 악하고 독한 생각을 버릴 수 있다.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 겉으로만 시늉하는 삶이 아니다. 그래서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뭐라 저를 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1).” 사는 길은 말씀을 붙들고 사는 길밖에 없다.

 

그러자니 때론 억울하고 분하여 속이 다 부글거린다. 한데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이와 같은 고난을 통해 더욱 예수를 닮아갈 수 있는 거였다. 고난 중에 참 위로가 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신 이가 예수시라.

 

주께서 아신다는 사실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까?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그 일이 얼마나 큰 고난이었겠나. 처녀가 잉태를 하였다. 사랑하는 여자가 내 아이가 아닌 성령의 아이를 가졌다. 당시 상황을 비춰보나 오늘 날 우리 상황으로 비춰보나 그 황당함과 난감함은 뭐라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곧 그런 사건이다. 그로 인하여 함께 하신다는 건 이제 우리가 아무 때나 하나님을 대면하고 마주할 수 있다는 소리다. 아브라함에게는 그저 옹기 가마의 연기셨는데, 이스라엘에게는 불기둥이셨고, 모세에게는 불붙은 가시떨기나무이셨고, 욥에게는 광풍이셨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곧 내 안에 계시고 대화하고, 삶의 우여곡절을 통해 배우고 매순간의 위로가 되신다.

 

이처럼 말씀을 맛보아 안다는 일. 그래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것’이다. 나는 늘 기억 속에 누구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매도하여 정죄하였던 생각밖에 없어서 그저 송구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런 이가 오늘 내게 보배로운 산 돌이 되셨으니 이보다 더 복된 은혜가 또 있을까?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4-5).” 버려져 쓸모없는 자로 사라져도 될 터에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게 하시다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삼으시다니!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6).”

 

오직 내게 한 가지, 주를 믿고 바라고 의지하게 하신다. 더하신 날들을 통해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려고, 기도로 생활을 가꾸어가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소통하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2).” 그래서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겠구나.

 

처녀로 잉태한다는 게 어떨까? 저와 혼인하는 자의 심정은 또 어떨까? 믿음이 아니고는 어찌 그와 같은 일을 감당이나 할 수 있었겠나? 세상이 뭐라 하든, 그와 같은 멸시를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저들의 비웃음과 멸시도 기꺼이 당해낼 수 있는 용기는 내 안에 모신 말씀으로 가능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일이다. 현실을 주 앞에 내려놓고 온전히 주의 뜻을 바라고 주만 의지하는 삶으로의 전환이다. 다른 데 기웃거리지 않는 일.

 

그러는데 있어 좋은 습관은 큰 힘이 된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동선을 따라 묵묵히 준행하는 것이 때론 삶을 흩어지지 않게 한다. 평일이나 공휴일이나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자리에 앉아 말씀을 먼저 묵상하며 이리 정하여 기록하는 일. 동일한 시간에 교회로 나가 묵상 글을 다시 읽으며 되새기고 때론 이를 글씨로 쓰고 또는 오전 내내 그와 같이 말씀으로 되뇌는 태도는 중요하다. 이제는 그리하는 게 가장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토요일이라 점심께 아내와 딸애와 같이 조금 먼 마트로 갔다. 점심을 먹고 딸애 무엇을 산다고 간 것인데, 어디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말이 길어졌다. 일련의 상황에 대하여, 서로 듣고 말하고 생각을 같이 하는 일은 귀하였다. 이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그러그러한 일을 두고 서로 합심하여 주를 바라는 것.

 

가족이란 각자의 그런 역할이고 가정이란 그리 세우신 작은 교회이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일이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16).” 나는 오늘 말씀을 그리 읽는다. 내려놓는다는 건 괜한 구호가 아니다.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다. 스스로 자발적일 수 없다. 고난이 주는 특혜다. 고로 주께서 내 삶에 들어오신다는 것인데 그로 인하여 나를 통제하신다.

 

다스리신다. 고로 세상은 자기주장과 주도적인 자아생활을 귀히 여기지만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여 예수를 따른다. 그러고 싶어 한다. 그렇지 못한 자신을 통회한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내가 통제하려 드는 모든 권한을 포기하는 일, 주께 모두 의탁하는 바 묵묵히 오늘 내게 두시는 날들을 주 안에서 살아드리는 일. 먼저는 용서였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 전에 용서를 하신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그러므로 예수를 바랄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두런두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결론은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같이 주목하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믿음의 자녀들이다.

 

그리하여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이와 같은 비결을 살면서 삶으로 알고 깨달아 돌이키는 것이 복이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신 이유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예수의 자취를 따르는 일.

 

예수를 바라보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4-25).” 우리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게 하시려고! 나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올려드리며.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시 3: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