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전봉석 2018. 10. 9. 07:49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베드로전서 4:7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시편 5:12

 

 

서로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내가 듣는 것을 저는 보지 못했고 내가 보는 것을 저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다 그렇지 뭐. 인생 뭐. 하는 식의 말이 입에 뱄다. 부모가 남긴 집 한 칸을 이번에 새로 증축 하느라 3억8천이 들었다느니 그래서 월세를 놓는 건물주가 되었고, 작년 한 해 주식으로 1억2천을 날렸다느니 그래서 돈이 없어 죽겠다느니 저의 말은 앞뒤가 없이 허무하였다.

 

두 아이는 공부에 담쌓고 뭐라 말하기 민망한 터에 아내와는 각방을 쓰고 지낸다며, 가끔은 왜 이러고 사나 싶은 생각에 서럽기도 하다면서. 의사인 형님은 알코올중독자처럼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기 위해 주말마다 등산을 가고. 그러다 일주일에 한 번은 오전 진료를 못하는 것 같다고. 왕처럼 사는 것 같다는 말에 내 마음이 다 허탈하였다. 저의 부친이 평생 술로 살다 술로 죽었다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모처럼 친구와 밤낚시를 갔고 그런저런 말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듣다보면 답답하고 답답하여 뭐라 이르면 나의 말은 맹랑하여 허공을 가르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그러다 작은 누이 아이가 여전히 우울증에 시달리며 바깥활동을 못하고 있어 대학도 포기한 채 어디서 상담만 의존한다며 걱정을 하였다. 그러다 문득 자기 두 아들도 다를 바 없는 소리를 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저의 처는 신학까지 한 이가 교회를 떠났고 먹고 사는 문제에 바동거리고 있었으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저에게 나는 그저 한량이라. 왜 그러고 있나,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 괴사하여 인공관절로 끼워 넣은 두 개의 고관절이 다시 문제가 되었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불량하였다. 빈속에 독한 진통제를 먹어서 뭐라 했더니, ‘까짓 거 뭐’ 하면서 함부로 자신을 굴리었다. 그런 것이다. 저의 재물을 또는 가정을, 자식들을 그렇듯 까짓 거 뭐, 하는 식으로 가벼이 여기고 사는 거였다. 만물의 마지막 때를 나는 어쩌면 친구에게서 본다.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잃고 앞이 안 보인다고 할 때도, 그 치료를 위해 먹은 약물 부작용으로 두 개의 고관절이 괴사하는 일이 벌어질 때도, 나는 두려움으로 주께 피하였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였었다. 나는 그와 같은 말을 친구에게 들려주었고, 이번에도 저가 건물주가 된 것이 부럽다기보다 안 됐고 답답하다고 말하였더니 친구는 뭔 소린지 못 알아듣는 거였다.

 

나에게 들리는 것을 저는 보지 못하였고, 내가 보는 것을 저는 듣지 못하였다. 돈보다 더 귀한 아내와 건물보다 더 귀한 자식에 대하여, 그 모든 것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영혼에 대해 저는 무슨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짐작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같이 글방에 왔다가 조카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고3인 큰 아들도 좀 여기까지 보낼 수 있겠나, 그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 누구 말고 너! 하고 아무리 말하여도 저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였다.

 

답답하였다. 그리고 속상하였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것도 주께서 주셔야 하는 일이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13:9).” 아무리 뭐라 한들, 자신의 몸이 병들어가고 그 영혼은 피폐하여 늘 술에 절어 사는 형을 왕처럼 산다고 부러워하는 것인지 비아냥거려하는 것인지.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 4:9).” 도무지 들을 귀가 없는 것이다. 공허한 몸짓으로 그 삶에 족하여 하는 것이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4:23).”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 5:12).” 곧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나를 호위하심이었다. 가장 오래된 친구로 내가 중1 때 삐딱한 마음으로 자살을 염두에 두고 살 때 저가 곁에 있었고, 내가 함부로 주를 멀리 하고 있을 때 저는 곁에서 몸이 망가지고 마음이 황폐하여 힘겨워하고 있었다. 저를 보면서 나는 주의 호위하심을 경험하고 살아온 생이었다. 그러니 영적으로 나는 저에게 늘 부채감이 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그런 말씀이 아닐까? 나의 감상적인 마음이 아니라 실제 저를 두고 주 앞에 긴 한숨을 내쉬며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는 마음. 결국 내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 가운데 하나를 얻어 짚고 돌아가는 저에게 나는 어떤 애잔함인지 안타까움인지 알 수 없는 연민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9-10).”

 

주 앞에 두는 나의 마음이 그러하였다. 보고, 듣고,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복되었다.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계1:12).” 이는 어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친구가 나를 한심하게 여기든 또는 오히려 안쓰러워하든지, 나는 맛보아 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백날 얘기한들, 숱하게 같은 말을 되풀이 한들. 들을 귀를 주지 않으시면 모든 게 허사라.

 

나는 이처럼 말씀을 씹어 삼킨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2).” 움켜쥔 사자의 으르렁거림 같이 더는 놓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가 뭐라 하든 뛰어간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119:32).” 그저 ‘내 사무실’로 표현하는 친구에게 나는 거기가 교회임을 알려주고 그곳에 오는 이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 대하여 말해주었다. 그런 말에 조카아이를 보냈으면 하는 것이니, ‘아니 너!’ 하고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말씀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곧 또 고관절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조금 두렵다 난, 못 깨어날까 봐, 하는 친구의 말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또는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그처럼 잘난 줄 알고 나름 열심을 다해 사는 것으로 자랑을 삼는 이가 ‘까짓 거 뭐.’ 하고 말 줄 알았는데, 두려워할 줄도 안다니! 왜? 죽는 건 무섭니? 나의 말은 우문이었으나 내가 물을 수 있는 전부였다.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사는 게 전부라면 죽는 게 뭐 두렵겠니? 죽음 너머에 영생을 두려워하는 일인데, 친구에게 말해주었으나 저는 들을 귀가 없었다. 부디 저가 바디매오처럼 예수께 뛰어올 날을 기도한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막 10:50).” 그런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주께 대신 저의 이름을 고하는 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나는 오늘 말씀을 그리 듣는다. 모처럼 간 밤낚시로 인해 온 몸이 아프고 쑤셔 보잘것없는 육신이지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범사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저는 나에게 그리 들려주시는 주의 음성이 되었고, 말세의 때에 그 허망함을 보여주시는 모형이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14).” 이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 고로 우리가 사는 길은 주께 의탁하는 삶이었다. 오늘의 축복은 그럴 수 있는 귀를 주신 것이고 이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신 일이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이는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