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전봉석 2018. 10. 11. 07:14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베드로후서 1: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편 7:10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말씀은 날마다 더해지는 사투를 상기시킨다. 이게 맞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은 내적갈등은 차치하고 외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아 늘 조여 오는 조바심과 안심하지 못하는 안달과 믿고 의뢰할 수 없는 의심으로 숨이 늘 턱까지 찬다. 늘 같은 일상의 반복이라. 아이를 다독여 글을 쓰게 하고, 병적으로 기억력을 잃어가는 아이는 숨을 조이고 기억을 짜낸다.

 

당장 어제 뭘 했는지, 아침에 무얼 먹었는지 기억을 못해 쩔쩔맨다. 여느 날 보다 두어 시간은 일찍 온 아이는 그래도 한 시간이 넘게 일기를 썼다.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싶으면서도 아이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기억해 낸 것을 표현하게 하고 말로나 글로 서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아이가 틱 장애처럼 몸을 경직하거나 횡설수설 말이 너무 장황하여 수습이 어려울 때는 내가 먼저 싸해져서 힘들다. 아침 일찍 와서 점심까지 먹고 오후께나 돌아가면 나는 순간 기진한다.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이와 같은 일을 감당한다. 아무런 소득도 성과도 없는 일 같지만 다시 또 다시 또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그러니까 내가 저 아이를 어찌할 수 있다고 여겨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부르시고 택하신,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그저 그리 감당할 뿐이다.

 

결국 이와 같은 일로 나는 세상의 썩어질 것들로부터 구별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4).” 이게 만일 돈벌이나 개인적인 보람을 느끼고자 하는 일이면 어땠을까? 친구는 그 조카아이가 어디서 상담을 받는데 시간당 너무 비싸서 혼자 아이를 건사하는 누이의 고초를 애석해하였다. 나는 다만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

 

이를 알면서도 늘 나의 내적갈등은 나와의 사투다. 아, 그래서 믿음에는 덕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구나. 그 덕은 나의 성품을 운운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써의 지식이 더해져야 하는 일이었고, 그 지식에는 나의 열정도 어떤 기대도 절제로 다스려져야 하며, 그리하여 절제는 곧 인내의 몫이었다. 내가 내 힘으로 참아내는 일이 아니라 주를 더욱 의뢰하고 바라는 경건으로 주가 보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를 사랑함이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 나는 오늘 말씀을 그리 붙든다. 그러니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하시는 거였구나! 알고 그리 그치는 게 아니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10).” 그래서 비록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는 않는 것이다. 이상한 일은 그런데도 싫지는 않다. 아이에게 드는 마음이 말이다.

 

이게 어디 내 것이겠나?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나의 방패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아이를 보내고 설교 원고를 작성하느라 다음 본문을 읽고 초안을 잡는데, 역시 사랑이었다. 이는 계명이었다. 그냥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내가 주의 사랑을 느끼고 누린 만큼 나로서도 그리 행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 사랑하면서 배운다. 그러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그렇구나. 내가 저 아이에게 드는 마음이 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로 가늠할 수 있겠다.

 

말로야 누군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지 않겠나?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심지어는 내가 종노릇하는 정도의 것이었겠다! 아이를 격려하기 위해 주전부리할 걸 사놓고 차를 내어주고 노트북을 돌려주어 뭐가 어떻다 그러면 일일이 시중드는 사람처럼, 성가시고 귀찮기도 하였는데.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아내는 ‘똥 싸는 아이’ 일로 늦게 또 전화를 하여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아이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를 설명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었으니. 우리에게 두신 일이 사랑하는 것이었다. 나는 설교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개요를 따라 뒷받침 성구를 먼저 고르고 찾는데, 그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먼저 들려주시는 주의 말씀이 아니겠나?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눅 6:32).” 그러니 어떤 성과도 기대도 어려운 가운데 묵묵히 그저 오늘에 두시는 ‘저 아이’를 ‘주의 마음으로’ 마주대하는 일이 사랑이었다. 주의 사랑은 우리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게 하고 알려주는 그런 막중한 일이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그렇지. 서로 사랑하면! 내가 저 아이에게 두는 마음이 내 것이어서 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으면 벌써 싫증이 나고 더는 견딜 수 없어 어찌 다른 데로 보내든가 아니면 내가 그냥 포기하고 말았을 텐데, 주께 맡김은 때로 간소한 일이다. 나는 그 성과나 결과에서 자유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나아지게 하시든, 어떤 놀라운 변화를 일으켜 무슨 능력을 나타내시든 그건 내 일이 아니었다. 그걸 바라고 하는 일이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이번에는 저 아이라!

 

그러다 또 후루룩 떠나면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겠으나 것도 내 일이 아닌 것이다. 어떤 자유함, 그 자유의 실체는 결과를 내게 묻지 않는 주의 긍휼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기면 되었다. 혹여 두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면 어땠을까? 더 큰 칭찬을 들었을까? 혹여 다섯 달란트로 두 달란트만 남겼으면 어땠을까? 조금은 아쉬운 소릴 들었을까? 나는 저들이 남긴 것을 어떤 성과로 보지 않는다.

 

우리 주인은 자신의 손해를 사랑으로 여기신다. 곧 주인의 것으로 우린 다만 선심을 쓰는 일이다. 저 아이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도 실은 그것이 우리를 위함이라. 나는 아내가 ‘똥 싸는 아이’를 예뻐라하는 게 종종 이해가 안 간다. 성가시고 귀찮을 텐데 싫어하는 마음보다 그리 여겨지는 좋아함이 때론 비밀스럽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어찌 말로다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다. 아이가 돌아가고 오후께 앉아 설교 원고를 준비하고 있다가 하필 그 본문이 사랑에 대한 말씀이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그게 또한 희한하였다. 이런 게 사랑이려나, 생각하다보면 송구하기만 한 것이어서 보면 또 내가 하는 일도 없이 괜히 생색을 내는 게 아닌가싶을 정도이다. 아이의 마음에 좋아라 해주는 것도 그게 어찌 내가 건사한다고 될 일이겠나.

 

오늘 말씀은 이를 소망 중에 더하게 하신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1).” 다시 말해서 나는 더 이상 천국을 사모하고 바라며 거기에 목숨 걸지 않는다. 누가 뭘 해야 천국에 간다는 소릴 들을 때 솔직히 민망한 생각마저 든다. 왜냐하면 이미 그런 일을 자꾸 그러자고 드는 일 같아서 말이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여기가 좋사오니!’

 

나는 엊그제 친구와의 말 속에서도 그리 되뇌었다. 어떠니 어쩌니 해도 지금이 나는 제일 좋다. 이를 아시면서도 주님은 ‘내려가자’ 하시고 우리를 일상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넉넉히 더욱 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곧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저절로 그리 되는 일이었다. 가끔은 아이를 대하다가 저절로 그리 되는 마음으로 내가 지레 놀란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2).” 이처럼 말씀 가운데 말씀으로 생각나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13).” 사는 날 동안 주가 더하시는 앎이라.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14).” 누구라도 벗어날 장막인데, 그 후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를 앎이다.


고로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17).” 오늘 내게 두시는 이 한 날의 장막 생활이 또한 주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겠으니,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그저 사랑할 뿐이다.

 

하여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