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전봉석 2018. 10. 12. 07:10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베드로후서 2:19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4-5

 

 

 

왜 저들은 ‘그럼에도’ 잘 되는가 했더니, 용의 권세를 받은 자들도 있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계 13:4).” 오늘 날 우리의 문화가 대부분 그런 것 같다. 이에 열광하고 사람들의 정신이 혼미하여 덩달아 어쩔 줄 모른다. 이에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 2:19).”

 

오늘 말씀은 아찔하다. 스스로 주인 되고 악을 악으로 선호하며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늘어나는 것 같다. 함부로 구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 같다. 이는 역설적인 경고다. 나는 그리 읽는다. 가령 나는 곁에 있던 사람들을 통해 그때마다 주의 음성을 들은 셈이다. 돈이 넘쳐나 주체할 수 없는 이가 있었다. 저는 평생 원수처럼 여겨 안 보고 살던 부친이 죽자, 가뜩이나 많은 재산에 더 많은 재산이 주어졌다. 강원도 탄광촌 어디 일대의 산이 통째로 저의 것이 되었다.

 

남편은 모 대학병원 내과 과장을 그만두고 개업을 하였고, 쉬엄쉬엄 병원을 운영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모두들 저이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두엄더미 사이에 있는 소는 굶주리는 법이다. 저들은 널따란 필지에 근사한 단독주택을 지었고, 지하층에는 아예 최첨단 오락실을 꾸몄다. 신형 게임기를 들여놓고 종종 사람들을 초대하여 밤새 즐기곤 하였다. 돈이 처벌처벌 넘쳐나는 사람들이라 그 씀씀이는 늘 거침이 없었다. 그때야말로 부럽기만 하여 늘 격세지감을 느끼고는 하였다.

 

아주 오랜만에 어떻게 지내는가 물었더니, 형제들과는 보지 않고 살고 그 많던 사람들과도 더 이상 연락하지 않고 지내며 자기들끼리 두문불출 무얼 하고 사는지 알 길이 없다고 하였다. 한때는 죽이 맞아 그리 어울렸던 사람들이라. 가만히 돌아보면 나에게 저들은 항상 경고의 나팔을 불어준 셈이다. 엊그제 만난 친구와 그 가족의 경우에도 그러하고, 확연히 드러나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모습은 겉보기와는 달리 처절하였다. 의사 형님의 알코올중독이라는 말이 계속 얹힌 듯 가슴에 남았다.

 

본디 죽어 마땅한 사람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나야말로 돌이켜보면 모든 게 다 은혜였다. 한 것도 없이 받기만 한 사람이라, ‘사랑의 빚’이란 제목으로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내내 송구할 따름이었다.

 

초딩 중딩 아이들이 오는 날이면 정신이 없다. 특히 중딩 아이 둘의 난처한 상황은 늘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다가가면 저만치 물러나는 일이어서 내가 알아도 아는 체를 먼저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주께 고한다. 보면 영락없다. 어째서 생활이 저처럼 처참할까 싶으면 그 부모가 교회를 다녔던 이들이다. 한때는 신앙이 좋았고 믿음으로 살았던 것이다. 아,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 2:20).”

 

여지없이 공통분모가 있었다. 나는 아이의 왕따가 안 됐다. 또는 아이엄마의 극성스런 간섭과 참견이 불쌍하다. 서로가 서로를 찌른다. 글로 써내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프다. 그런데 더 다가갈 수 없어서 힘들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니 저들 또한 내게는 경고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두루 곁에 두시는 나팔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게 은혜였다.

 

그런데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21).” 이보다 더 무서운 경고가 있을까? 정말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22).” 그게 또한 나였어야 마땅한데 주의 은혜로 나는 이제 저들을 마음에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친구도, 선생도, 오래 된 나의 지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을 등지고 산다. 저마다의 논리와 원칙을 가지고 나름은 멋지게 산다.

 

종종 누구 생각이 나면, 또 어떻게 우연히 통화를 하고 난 뒤에는 이처럼 한동안 마음이 허망하여 어지럽다. 지금 와 생각하면 아찔한 것이다. 아이들이 아이돌 노래에 열광하고 아무리 뭐라 해도 오히려 적개심을 품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일이라, 그러게 ‘용의 권세’가 아니고는 오늘의 문화를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종종 아이들이 귀에 꼽고 듣는 노래들이 무섭다. 왕따여서 또는 엄마의 지나친 참견을 피해, 아이들의 유일한 돌파구가 그것이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그러다 같이 운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백 마디 말보다 같이 읽고 듣는 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그것으로 돌봄이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 8:15).”

 

마음이 상한 자들이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종종 내가 더 두렵고 외로울 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저는 나의 생에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우리는 긍휼하심을 따라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더는 어찌 뭐라 할 수 없는 지점에서 나는 아픈 마음을 느낌으로 아이를 주께 고한다. 저 아이들이 주 앞에 나오기를 바란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잘했다잘했다 칭찬해주면서,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말씀 앞에 고한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지금 이처럼 내 안에 더하시는 안타까움이 신비라. 대체 왜 내가 이 아이 때문에 마음을 쓰고 힘들어하는가했더니, 지금 이 세상이 너무 악함이다. 저들이 흥얼거리는 노래나 동영상을 보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다들 그렇지, 그러는 게 다 한때지, 하고 놓아두려니까 마음이 답답한 것이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벧후 2:13).” 아이들이 금세 물든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14).” 두려운 마음이 이는 까닭은 내가 저들과 어울렸던 때를 생각함이다. 그러느라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때를 회상함이라.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17-18).”

 

나는 이제 그 수렁에서 건진 바 되었다, 하고 안도하려니까 여전히 그러한 사람들과 아이들을 곁에 두시는 것이어서 외면할 수가 없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 한들, 그때 내 귀에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던 것처럼 지금 저 아이들이 그러한 것이었다. 이리 어르고 저리 달래 봐도 흥얼거리는 노래와 춤과 저들의 현란한 생활을 부러워할 따름이다. 당장 자기들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19).” 그러니 아이들이 돌아가고 마음이 휑한 것을 어찌 감당할지 모르겠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5-36).” 주를 바랄뿐. 내 안에 드는 이 마음이 행여 자고하는 마음이 되지 않기를.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이제 그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으니, 부디 저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그런 시절을 지나 언제쯤 주 앞에 돌이켜 오늘의 허물과 실수를 도리어 은혜의 근거로 삼을 수 있기를.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