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귐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일서 1:3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10:14
눈으로 본 적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나는 아이에게 그냥 믿으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믿고 안 믿고는 우리의 말 밖의 말들로 이루어지는 일들로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것뿐이다. ‘와 보라’ 하는 말밖에는 전하여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곧 ‘우리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의 것이었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 것을 홍시 맛을 어찌 아느냐고 물으면 뭐라 말할 수 있겠나?
아이는 열 시까지 온다고 하곤 열한 시 반이 다 됐는데도 오지 않았다. 그만 정리하고 올라가려고 하는데 거짓말처럼 그때서야 오는 것이다. 그냥 가라, 하고 돌아서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전날에 친구 일로 뭐라 했던 게 마음에 걸리기도 하였고, 앞서 ‘오지 않았으면’ 하고 여겼던 마음이어서 미안하기도 하였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 늘 말 밖의 일이라, 솔직하게 아이를 대하고 꾸며내지 않는 게 옳다고 여겼다.
모든 건 주께서 하신 것이라. 아이를 오게 하시는 이도, 싫고 싫증나고 성가신 마음과 달리 내 안에 두시는 ‘어떤 끌림’에 대하여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실제 아이도 자신만 모를 뿐이지 자신이 왜 여기에 오는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끌림’에 의한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스스로 있는 것에 대하여는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어서, 아이가 안 믿는 하나님을 애써 증명할 필요는 없는 거였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다만 그렇듯 함께 사귐을 얻고자 하는 일인데, 나의 말은 힘이 없어서 아이를 움직일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듣고 안 듣고, 믿고 안 믿고, 이를 어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겠나? 마음 같아서는 야단을 치고 쫓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늦어서 글을 쓰기는 그렇고, 같이 나가서 짜장면을 먹였다. 아이도 미안했던지 차를 한 잔 사주었다.
성가시고 귀찮아 욕이 올라오던 것인데, 그리 되어 아이와 더 깊어진 듯하였다. 이렇듯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일을 묻거나 듣거나 하는 일은 돌아앉아 나 혼자 글을 쓰는 일보다 헐겁다. 헐거운 틈으로 청명한 가을 하늘이 찢어질 정도로 파랗게 물들었고 그늘진 곳으로는 찬바람이 휭휭 스쳐지나갔다. 아이는 생각보다 말을 잘 했고 할 말이 많았다. 나 혼자 궁리하고 속 끓이는 것보다 직접 대면하고 뭐라고 말하고 듣고 하는 일이, 그 헐거운 틈으로 속엣 마음이 드러나는 거였다.
주일에 오기를, 안 믿는 마음으로 그냥 나와도 된다고, 우리의 사귐은 너나 나나 어떤 알 수 없는 끌림에 의한 것임을 말해주었다. 주의 사랑은 생각보다 적극적이고 글보다 실제적이며 말보다 위대하시다. 내게 두시는 마음이 결코 내 의지의 것이 아님을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곧 아이의 마음이 그 이상의 뜻을 담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는 걸 보면 오고 싶지 않아야 마땅한데 그렇게 늦잠을 자고 늦게라도 오는 일이 어떻게 말로다 설명이 될 수 있겠나.
또한 주의 사랑은 구체적이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롬 13:13).” 그래서 아이 앞에서 더욱 단정히 행한다. 방탕한 말이나 생각을 거둔다. 술 취하지 않는다. 곧 다른 것으로 이를 섞어 혼용하지 않는다. 음란하지 않는다. 호색하지 않는다. 이는 실제 내 안을 기웃거리는 마음으로 나만 아는 짙고 어두운 그늘 같다. 다투지 않는다. 말씨름 하자고 들면 피곤하다. 시기하지 않는다. 누구와 견주지 않는 일이다.
성가시고 귀찮아서 오지 않았으면 했던 마음과는 달리 막상 아이가 오자 ‘성령이 주도하심’을 느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이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애가 싫다. 그렇듯 함부로 굴고 멋대로 여기는 아이는 딱 질색이다. 선을 긋고 더는 상관하지 않으면 될 텐데, 그럴 수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더 크시다. 그리 여겨졌다. 나는 그 말도 해주었다. 주의 마음이 아니면 내가 널 마주대할 이유가 없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너를 생각한다. 그리 자꾸 마음이 쓰인다.
결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 오늘 전하여야 할 말씀의 중심에 서게 하시는 것 같았다. 말이 좋아 사랑이지 사랑보다 잔인한 게 또 있을까? 가장 지독한 것이 ‘자기애’이고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이 아이엄마들의 물불 안 가리는 마음이지 않겠나? 근본은 사랑이었는데 저도 어쩔 수 없어 주체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아이가 게으르고 영악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남을 위하지 않고 고집불통인 것은, 그만큼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더욱 더 고독한 일이었다. 애쓴다고 애쓰는 만큼 더 허기지는 사랑이었다. 나는 우리에게 보내시는 아이들의 면면이 다들 그렇다는 데 확신한다. 증명이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누구는 말하길 이 지역이 낙후해서, 임대아파트 아이들이라, 유난히 어려운 형편들이라 하는 말로 구획을 나누려 들지만 옳지 않다.
그래서 네 두 아들은 온전한가? 하고 친구에게 물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3인 큰 애는 아예 대학을 포기했고 뭐가 되려는지,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렇다고 고1인 둘째는 더 공부를 못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으니, 그 두 아들 얘기를 애물단지처럼 여겨 지겨워 혀를 차면서도 남의 얘기하듯 듣는 것이다. 원래 그런 법이다. 모두가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이가 그렇게 한 시간 반씩이나 늦었으면서도 글방으로 온 것이 되레 불가항력적인 의미가 아닐까?
짜증이 나서 그냥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붙들고 뭐라 이르고 같이 점심을 먹고 더 많이 위해주고 이해하고 싶은, 내 안의 이 이상한 마음을 어찌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 미천하고 미약한 나의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오늘 말씀을 나는 그리 마주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나는 아이가 나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렸으면 좋겠다.
그 깊은 외면과 고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길 바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까? 그러는 동안 나는 또 같은 말과 마음으로 얼마쯤 더 견뎌야 하는 일일까? 결코 내 안에 좋은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저런 아이’가 싫다! 싫어서 싫다고 하는 만큼 더더욱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마주대하게 하시는 데야 별 수 있나? 나는 종종 그러는 내가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단지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가 아니다. 어떤 기대를 갖고 하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과연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싶은 회의와 갈등으로 새겨지는 마음이라 어렵다.
나무는 1년에 한 바퀴씩 나이테를 두르며 자라간다. 그 자람은 눈에 띄지 않게 미미하다. 어디서 봤더니 동글조개는 매일매일 민물과 썰물의 흔들림을 자신의 껍데기에 새겨 그 자취가 쌓여져 나이테를 갖는다고 한다. 한 번도 눈여겨 본 적이 없는 소금도 이글거리는 한 여름의 폭양을 견디어 새겨지는 바람의 무늬를 나이테로 가진다고 하였다. 어쩌면 우리의 사귐이란 이와 같은 나이테가 선명하게 새겨질 때에야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영광을 올리는 사이가 되는 건 아닐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 10:14).” 우리는 누구나 ‘재앙과 원한’을 사랑의 매개인 줄 알고 산다. 주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가운데서 가장 지겹고 힘에 겨운 게 우리네 사랑이다. 참견하고 반항하고, 간섭하고 분해하면서! 나는 나의 낮고 순한 말로 아무리 그럴듯하게 묘사하고 고백한다 해도 우리의 사랑은 그 정도이다. 오히려 그 정도여서 사랑이다.
내가 아내를 대하는 마음도, 자식들에 대한 마음도 뒤집어보면 그게 다 염려뿐이라. 그것이 나의 병적인 불안증인지 그저 평범한 근심인지 나는 규정할 수 없다. 다만 돌이켜서 보면 그저 염려하는 마음에서 화가 나고 짜증이 일고 속상하고 또한 애간장이 탄다. 주의 사랑이 아니고는 우리는 재앙과 원한뿐이라. 주의 손으로 갚아주셔야 할 일이다. 비로소 영혼은 외로움으로, 아이가 그렇듯 늦어서라도 글방으로 온 게 아닐까? 단지 글방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교회다. 주의 성전이라.
서로는 알 수 없고 자신도 그저 외면하려 드는, 주의 이끄심이다. 우리의 어떤 끌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귐을 바라는 영혼의 불가항력이다.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