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의인이 무엇을 하랴

전봉석 2018. 10. 15. 07:16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한일서 2:24-25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편 11:3

 

 

말씀을 전하다 보면 세 번 이상의 놀라운 성령의 감동을 경험한다. 한 번은 말씀을 준비하는 동안에 볼 때마다 느끼는 새로움이다. 그에 따른 성경을 찾아가다보면 생각나게 하신 이가 알아듣게 하시고 알아듣게 하시는 이가 할 말을 보이신다. 다음은 며칠 동안 그 내용을 풀어가며 할 말을 작성하는 데서 그 단락이 나뉘고 의미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작성할 때와 같이 주일 날 아침 마치 막바지 시험 공부를 하는 아이처럼 밑줄을 긋고 메모를 더할 때 새로 열리는 길이다.

 

어제는 그 다음으로 설교를 하다 전혀 예상하지도 준비하지 못했던 내용을 서두에 먼저 풀어내게 하시는 것이다. 때로는 미적거리는 것 같고 때로는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 같은데 보면 또 그게 새롭고 놀랍다.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들어왔다. 위층에 있는 요양병원의 나이든 의사로 언제든 호출이 오면 가야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양해를 구하고 온 것이다. 그때 나는 본문에 앞서 우리가 진 ‘사랑의 빚’에 대하여, 그 외에 아무 빚도 지지 않는 데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면서 사는 동안 어떻게 서로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우리는 다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과 양보와 배려와 용서를 빌어 산다. 이를 권세 잡은 자로 그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우리가 소위 ‘갑질’이란 표현을 쓸 때 그렇지 않은 삶은 없다. 을도 병에게, 병도 정에게 혹은 정이 갑에게 그렇듯 갑질을 떠는 게 인생이다.

 

이에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삶의 원론적인 법칙은 늘 갚는 삶이어야 한다. 이는 양심에 따른 것이고,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5).” 선을 행함으로 의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4).”

 

곧 우리는 누구를 지지할 수 있으나 그의 권세에 굴복하는 존재가 아니다. 저를 존경함은 저를 세우신 이를 존경함이고, 저는 그의 사역자라. 일꾼이라. 그러므로 저도 우리와 같은 주의 은혜 아래 거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할 때 사랑보다 무거운 빚이 또 있겠나? 자칫 이와 같은 권세의 원리를 벗어나면, 사랑으로 갑질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는 한다. 이보다 더 꼴불견이 어디 있겠나?

 

그러한 내용으로 서두가 길어질 때 저는 슬그머니 들어왔다가 말씀을 전하는 중간에 호출을 받고 나갔다. 전에 한 번 청소를 하다 책을 구경하러 와서 안면이 있는 터였다. 느닷없는 저의 방문은 그토록 올 줄 알고 기대하였던 중3 아이가 나오지 않아 서운해 하던 마음을 대신하였다. 누가 오고 누가 안 오고는 전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만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시는 바, 서로 사랑하라는 것.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그 사랑은 막연한 충동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 구분이 명확한 것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 실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째서 나 같은 자를 그처럼 사랑하셨는지 말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역사가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아내가 ‘똥 싸는 아이’를 예뻐하는 마음과 내가 ‘중3 아이’ 때문에 마음이 쓰이는 일과 같을까? 우리가 늘 순하고 어벙한 ‘아픈 아이’를 가족처럼 대하는 마음에서일까? 아이가 부쩍 정신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을 때면 모두가 신경을 쓰고 무슨 일인가, 돕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사랑의 빚 외에 아무 빚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갚고 또 갚으며 사는 것이라 여겨졌다. 주께 받은 사랑을 갚을 길 없어!

 

나는 사실 중3 아이가 올 줄 알았다. 그만큼 주일에 같이 나왔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다 문득 또 떠오른 게, 그러니 우리가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 어떻게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함께 했고 저 아이들이 1, 2년 사이에 모두 세례를 받을 수 있었는지 그게 신기하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두시는 부흥이란 한 영혼으로도 너끈하고 충만한 수고와 기쁨이 아닐까? 누구를 사랑해서 그 사랑으로 누구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사랑은 결국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거였다.

 

어느새 내가 변화되고 내가 달라져 있었다. 나이테와 같이 소리 소문도 없이 자라고 있었다. 그게 뭔지 모르면서도 그저 말씀 붙들고 씨름하는 동안 저절로 똥 싼 아이를 돌보고 있었고, 예수를 알지 못하는 저이를 위해 수고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그러므로 사랑하여 말씀을 이루어가는 일이었다. 이처럼 말씀은 또 새롭게 나를 조명하신다. 전혀 예상도 못했는데 나이든 의사 양반이 불쑥 들어와 같이 예배를 잠깐 드리는 것도,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2:24-25).” 우리는 다만 말씀 가운데 거하는 것, 그게 무엇인지 때론 모르면서도 이미 그리하고 있었다. 사랑의 빚이란 내가 자꾸 거저 받는 은혜였다. 넘쳐나는 만큼 옆 사람에게까지 흘러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사랑은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주의 사랑이었다.

 

내가 누굴 위해 설교를 하는 게 아니었다. 중3 아이를 위해 애쓰는 일도 아니었다. 안 나오고 못 나오는 아이들을 위한 애달픔도 아니었다. 그것으로 시달리고 시달림으로 기도하는 동안 내 안의 주의 영이 기뻐하시는 일로써 ‘사랑의 빚’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빚은 지면 질수록, 내가 인색하여지는 게 아니라 너그러워진다. 궁핍하여 내가 곤란스러울 것 같은데 오히려 풍요로워진다.

 

아, 그래서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그 사랑의 빚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였다. 더는 연연해하지 않아도 될 것을 알게 하고, 때로는 의연함으로 인색할 줄 알았는데 더욱 인자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소래포구에 나아가며 생각하였다. 다 늦게 배운 자전거에 아내는 이리저리 처박히면서도 즐거워하였다. 그 기록으로 여기저기 멍들었다.

 

완연한 가을 기운에 사람들은 무리지어 와글거렸고 바닷물이 빠진 갯벌에는 손톱만한 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아직은 따가운 햇살이 골창 위로 눈이 부셨다. 누군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우리 안에 우리 눈으로 본 것 이상의 확신이 드는 까닭은 내가 저를 사랑하고 있어서이다. 어째서 ‘저런 아이’를 사랑하는가, 나는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라 설명할 길도 없다. 다만 그리 행하게 하시는 이의 사랑이라, 그 빚으로 오늘이 풍성하였다.

 

아내와 딸애는 사람들이 더 와글거리는 어시장쪽을 가려하고 나는 자꾸 한산한 곳으로 비껴나려 하면서 때로는 서로를 잃고 한참씩 기다리는 동안 생각은 저 혼자 깊어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보다 확신 있는 사랑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그 온전함에 대하여 나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그러므로 더욱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어서.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나는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구르며 생각하였다. 땅을 딛고 구르는 동그란 바퀴는 동그란 땅의 중력으로만 중심을 잡는다. 하나님으로만 중심을 잡으려 할 때 사랑은 지고 또 져도 그 빚이 늘지 않는 것이어서 넉넉하다. 내가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멍에를 멨는데 쉼을 얻는다는 이 역설적인 구조는 바퀴가 굴러감으로 중심을 잡는 원리와 같았다.

 

굴러감으로 자전거는 길 위에서 안전하였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 11:3).” 내가 의인인 게 아니라 내가 의의 빚을 지고 사는 그 터 위에서의 의로움이었다. 곧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4).” 주가 돌보심으로 새로운 한 날을 맞이하였다. 하나님이 어찌 이루어가실지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안전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바퀴는 굴러감으로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곧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15-16).” 인생의 가장 소중함은 지나간 것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자전거는 직진뿐이다. 뒤로 갈 수 없다. 돌아가는 일도 실은 또한 직진이라. 뒤로 굴러가는 자전거는 기괴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로 사는 일은 기쁨으로 그 빚을 누린다. 곧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1:3).” 내가 누구를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 이를 삶으로 살면서 그리 마주대하고 사는 일이 귀하였다. 오직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2:17).”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시 1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