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요한이서 1:9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다 저녁에 아이엄마가 전화를 하였다. 아이 때문에 통화가 여의치 않아 집에 들어가기 전 아파트 주차장에서 거는 거라 하였다. 그간의 긴 설명과 여러 상황들을 들었다. 아이까지 맡긴 마당에 편히 연락하기가 어려웠고, 그런저런 심정을 헤아리느라 피차 여의치 않았던 거였다. 가능성을 두고 희망하였고 앞날을 염두에 두어 여러 생각이 많았다. 주로 듣기만 하여 그 심정을 토로하게 하였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이 너무 더딘 것 같을 때가 있다. 우리는 안달을 부리다 그 조급함 가운데 죄의 원줄기가 있음을 본다. 아내가 올라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성경 읽기가 창세기로 다시 넘어가면서 아내의 질문이 늘었다. 설명과 질문 가운데서 우리의 삶을 재조명할 수 있었다. 죄의 유혹은 간단하였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달라 보이는 것이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7).” 그 결과는 벗음과 벗김의 수치였고, 수치로 인한 낮은 자존감이었다. 하나님과 같이 동산을 거닐 던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죄책에 사로잡혔다. 스스로 감추고 덮는 수고가 따랐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8).”
달리 우리에게 어떤 방도가 있을까? 소망이 필요하다. 이는 그리스도로 덧입은 삶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 긍휼하심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나는 아이엄마에게 다른 것보다 아이가 다음 달에 학습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 알려주었다. 같이 와서 축하하고 축복하기를. 더불어 우리도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하는 것을.
사느라 찌든 삶이라 쉬는 날은 거의 실신을 한다는 말에 안쓰러움이 더해졌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부르심의 소망이 있다. 아이의 그런 고충이 허사가 아닌 것을 확신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어찌 즐거워할 수 있는 상황이겠나. 그러나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앎이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성령이시다. 그리 하실 것이고 하고 계시며 하게 하신다. 한 시간이 넘는 아이엄마와의 통화에서 정작 그 영혼이 고단한 것이었음을 알겠다. 우리 안의 믿음으로만이 답이었다.
오늘의 어려움은 결코 헛되지 않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우리는 더디다고 하나 여전하여서 내 안의 안이함이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으로 우리의 애씀과 수고를 둔갑시킨다. 남들이 사는 모습이 다 그런 것 같고, 자신만 왠지 억울하고 분하여 서러울 따름이다. 주의 사랑을 잃은 것일까?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그러니까 우리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여기가 끝이 아닌 것이다. 베푸시는 사랑에 대하여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다만 듣고 호응하고 그렇듯 말의 물꼬를 튼 것에 대해 감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그럴 권리가 있다. 한 아이는 너무 자기를 감추었고, 한 아이는 다른 데 시선을 두고 글을 끌어갔다. 둘 다 재미없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모든 글은 자기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리 읽히고 전개된다. 그러한 우리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어느새 주의 것이라. 이전부터 그러했던 것을 새삼 몰랐었다는 듯 시치미를 뗀다. 나는 아이들을 어찌할 수 없다. 내가 다루어 해결될 일이 아니다. 다만 읽히고, 설명해주고, 그것을 자기 삶으로 가져가게 하는 수밖에.
이미 우리는 죽었다. 죽었던 우리를,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러므로 더는 내가 내 것이 아니다. 값 주고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4:8).” 세상으로 끌려갔던 나를 도로 찾으시고, 찾은 바 된 나를 더는 잃지 않으실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지나침이다. 자식에 대한, 자신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지 못하게 한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저의 마음에 염려와 근심은 그런 거였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무얼 구할 수 있을까? 대체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이로써 우리의 변화된 삶을 조명하게 하신다.
먼저는 주 앞에서 정직하게 행한다. 공의를 실천한다.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한다. 아무도 모른다 해도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3).” 그 상태가 분명히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선악을 알 줄 아는 마음에서였다. 어찌 보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당당하고 주도적인 삶의 전형이 아닌가?
우리는 이제 그와 같이 망령된 자를 멸시한다. 더는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한다. 함께 주를 바라고 의지한다.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개하지 않는다. 묵묵함이 더해지는 것이다. 미련한 것 같고 때론 한심하기까지 하나, 더는 이익을 탐하지 않는다. 뇌물을 받지 않는다. 남을 탓하지 않는다. 곧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5).” 오늘 말씀이 중심을 잡게 하시는 것 같다.
결국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본질을 정복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이에 끌려 다니기 일쑤여서 번번이 그 삶은 고단하다. 피로에 지쳐 기력이 없다. 그것이 저 아이 때문인 것 같고 자신의 박복한 팔자인 것 같아 서럽다. 나는 뭐라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주께 바라였다. 너무 느리고 더딘 것 같은 조바심에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나, 아이의 오늘이 어느 훗날 우리 자신을 주 앞에 바로 세워준 동기였고 의지였을 것이다. 눈물겨운 아이엄마의 사투가 결코 공연한 게 아님을 확신하였다. 여전히 세상적으로 거는 기대와 어떤 희망이 우리를 그릇 행하게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주의 더딘 보폭이 실은 우리의 어그러진 발걸음 때문인 것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바로 그 고단한 하루였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보면 그게 장애 아이의 엄마여서도 아니고, 이혼한 가정의 억척스런 모친과 외조모의 간섭에 절은 중2 아이여서도 아니고, 먼저 늘 자기 아집에 억지를 부리는 중3 아이의 괜한 왕따 시절이어서도 아니다.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은 탄식한다. 그저 가볍고 말할 수 없이 가벼운 존재로들 살아간다. 이에 우리는 속량을 기다린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3).” 그러므로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요이 1:5).” 오늘 말씀은 손을 내미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두신 바 이 한 날의 사명이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6).” 나는 아내에게 강조하기를 기도도 필요하고 찬송도 중요하나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말씀을 붙들자. 다른 더 좋은 수를 알지 못한다. 흔들리지 않은 나무가 어디 있겠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라 해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때론 요동하고 때론 그 흔들림에 질식할 정도이나, 우리의 그 뿌리는 말씀에 박힌 것이어야 한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1:7-8).” 공연히 애써 수고하는 인생이 허다하다. 자기 수고에 지친다. 그 지나침이 우리로 그릇 가게 한다. 이에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9).”
아이들은 이제 의당 글방에 오면 성경을 가져다 잠언을 한 장 읽는다. 그 가운데 와 닿는 한 구절을 옮겨 적고 그 의미를 되새긴다. 설명을 바라면 기꺼이 나는 말해준다. 이를 자기 생활로 가져다 자기 이야기로 풀어간다. 고작 800자 남짓한 글이지만 조막만한 손으로 연필을 꾹꾹 눌러 자기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모습은 경이롭다. 그렇듯 우리 안에는 누구나 하나님을 알만한 눈과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아침 다윗의 물음 앞에서 답을 구한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