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전봉석 2018. 10. 20. 07:15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삼서 1:2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심성이 고운 아이다. 아침 일찍 누구 이사를 도와주고 왔다. 그렇게 상기된 표정으로 와서 일련의 상황을 말해주다 갑자기 가방을 잃어버린 것 같다며 순간 노랗게 질렸다. 여기저기 전화도 해보고 카톡도 남겨두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또 뜸금없이도 집에서 안 가지고 왔나? 하면서 그걸 기억해내지 못해 감정은 저리 널뛰듯 하였다. 덩달아 불안했다가 긴장했다가 아이 덕분에 나까지 롤러코스터를 타는 셈이었다.

 

다음 월요일부터 가야 할 취업알선훈련 공장에 복지사가 집에서부터 데리고 간다고 했다가, 거기 어디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하다가, 혼자 가야 한다고 했다가, 그래서 오전 열시 반에 약속을 했다고 하다가, 한시 반이라고 했다가. 아이는 아무래도 벌써부터 긴장이 되는가보았다. 나는 그곳 주소를 받아두고 아이 집에서와 우리 교회에서의 거리를 가늠해보고, 어딘가 하고 미리 더듬어 찾아보고, 모의 주행 경로를 탐색해보기도 하면서 나 역시 덩달아 마음이 쓰여 혼났다.

 

저녁께 아내가 올라와 같이 예배를 드리고, 이번 주일에는 부모님이 오시기로 하여 장을 보러 가야하는데 조금 멀리 있는 마트로 갔다. 일부러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알려준 주소로 해서 그 공장이 어디인지 그 주변을 살펴보고 위치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이래저래 신경이 쓰이는데 이상하게도 그리하게 된다. 아이와 같이 있을 땐 덩달아 긴장을 해서 그런가, 똥을 세 번이나 쌌다. 나 역시 병적으로 예민한 것이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좀 더 건강한 사람에게 맡기셨으면 좋았을 텐데, 종종 그리 생각도 든다. 그럴 때보면 아내는 대단한 것 같다. ‘똥싸개 아이’는 이틀이 멀다하고 팬티에 똥을 지리고 왔고, 그럴 때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있는데도 아내는 그 사태를 어찌 혼자서 수습하는가 모르겠다.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마치 우리는 하루에 있었던 일을 서로 풀어놓듯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아내는 늘 사역의 최전방에서 맞서는 전사 같다. 아이들뿐 아니라 지긋지긋한 엄마들 상대하랴, 이런저런 집안 일 살피랴, 오늘은 또 늙은 장모와 함께 장모만큼 남루해진 동대문 집 월동준비를 하러 가야 한다.

 

뭐라고 투덜거리다가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아내를 위해 간구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종종 내가 못나서 자신이라도 더 강해져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지만, 나는 아내의 그 말에 전심으로 동의한다. 저마다 우린 생의 최전방에서 씨름하는 것이다. 아이는 횡성수설, 그 감정의 간극이 먼 날과 가까운 날의 컨디션이 다른데도 어디를 다니고 누구를 만나고 무얼 해야 한다고, 나름 최전선을 뛰어다니는 군병 같다.

 

같이 점심을 먹고 돌아와 한시름 놓은 아이는 햇살 듣는 자리에 앉아 흥얼거리며 휴식을 취했다. 나는 가만히 간구하기를, 주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시 31:3).” 나의 행함과 그 수고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스스로 겸비하여 주는 의로우시다, 아뢰고 고하여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대하 12:6).”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시 31:1).” 주의 공의는 곧 긍휼하심이었다. 곧 주님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나는 그리 아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나는 그저 생색만 낼뿐이지 정작 하는 게 없는 사람이라, 주가 이루셔야 할 거였다.

 

슬그머니 어느 주소를 치고 그쪽으로 돌아서오자 아내와 딸애도 어휴, 하면서도 이해를 하였다. 어쩌다 내가 데려다 줄 수도 있는 거리인지. 늦은 밤 다들 퇴근 시간이 지나서 차가 뜸한 시간을 틈타 그리 나는 소극적으로 가보는 정도였으니, 부끄럽기도 하다.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거여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시 25:2).” 내가 못난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그렇듯 마음이 쓰이는 게 더욱 희한하였다. 못하겠다 하면 되는데 할 수 있는 만큼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으니.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71:3).” 그래서 더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복이어야 하지 않겠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143:1).” 누구한테 이런 소릴 할들? 뭐라 하다보면 공연히 나 잘났다는 소리로나 들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86:1).”

 

나는 주께 아뢰는 게 복되었다. 이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8:2).” 내가 좀 더 건강하여 또는 온전하여서 척척, 아이들을 돕고 주의 일에 거침이 없었으면 좋으련만. 이 정도 소극적인 정도에서뿐이지만 그래도 그래서 더욱 주의 이름으로만 구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오늘 내게 두시는 이와 같은 어려움조차도 실상은 주의 성실하심이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119:75).” 그렇듯 괜히 신경을 써서 그런가, 아이가 돌아가고 오후께는 허리도 너무 아프고 머리도 띵한 상태였는데, 마침 중3 아이가 체육대회 때문에 못 온다고 전화를 하였고, 특수학교 친구도 저녁에 갑자기 회식이 잡혀서 못 온다고 연락을 주어 다행이었다. 모든 것이 이처럼 적절하였다.

 

그럴 수 있는 우리의 무기는 언제나 기도였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141:5).” 갑자기 기운이 풀려 소파에 널브러졌다가 아내가 교회로 올라와 같이 저녁예배를 드리고, 그리 먼저 아이의 일터를 가볼 수도 있었으니.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33:5).”

 

언제나 말씀은 내가 아뢰고 구하여야 할 길을 닦아놓으시는데 특별히 또 시편에서다. 날마다 근심 가운데 있으나,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6:7).” 그럴 때마다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으로 주께 고하고 아뢸 수 있는 병기가 숨겨져 있었으니 기도였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30:10).” 이보다 더 귀하고 든든한 버팀이 또 있을까?

 

곧 오늘 말씀도 이에 확신을 더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6:11).”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었다는 데 놀랍다. 고로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하다못해 나는 나의 젊은 날 내가 이처럼 주를 바라며 살게 될 줄은 꿈도 못꿨는데, 난들 나의 남은 생을 알겠나?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

 

오후에 아들과 통화를 하고 격려를 하다 내가 또 시무룩해져서 주께 바라는 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63:1).” 그리하여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 이처럼 주의 성전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 복되고 감사한 일이어서.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1:4).”

 

은혜란 출세나 성공에 있는 게 아니었다.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것으로 판명나는 게 아니었다.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15).” 우리가 서로를 문안함이란 저의 형편을 살피고 위하여 주께 아뢰며 주의 이름으로 의지하는 일이었느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우리는 늘 주의 이름으로 아뢰는 생의 최전방에서 내남없는 전사다.

 

이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