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 3:8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편 20:5
그 자체로 귀한 것이다. 무엇을 더하고 꾸며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아이의 일기를 읽으면서 새삼 그와 같은 기쁨을 나눈다. 더러는 안 됐다고 여겨 혀를 끌끌 차지만 나는 누구 못지않게 저 아이가 그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동안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 ‘작은 능력’으로 주의 말씀을 지키며 주를 배반하지 않는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8).” 나는 말씀 앞에서 우리에게 두신 저마다의 슬픔을 또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생각하다, 그것으로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고 구할 수 있다는 게 복된 것을 깨닫는다. 그저 누구에겐 슬픔이지만 그 슬픔으로 우리는 주를 찬송하는 것이다.
아이가 쓴 글을 누구에게 보여주었다. 저는 잘 모르겠다며 그저 안타까움만으로 혀를 끌끌 찼다. 내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저는 함께 주를 찬양하지 못하였다. 그저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것이 상대적으로 다섯 달란트보다 적고 두 달란트보다도 적은 일이라 해도, 비록 어느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며 헌데를 앓고 개가 와서 핥는 수모를 겪고 사는 주제라 해도, 무던히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붙들고 사는 생이면 다윗보다 모세보다 못한 게 뭐인가.
아이의 가장 소중한 자신은 비루한 자기 처지를 한탄하지 않는다. 누가 주는 믹스 커피 한 잔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한다. 자신을 조롱하는 이에게도 맞서지 않는다. 나는 아이의 승리로 개가를 부른다. 주께서 저 아이의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한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5).”
신학자 프란시스 쉐퍼는 말했다. 우리 사람의 목에는 녹음기가 하나씩 달려 있다. 어느 훗날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그때 그 녹취록은 증거자료로 제출될 것이다. 누군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하였다. 아이가 하나님께 바라는 게 정말 온전한 정신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나는 저의 말에 낙심하였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나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보기에 그러그러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우리가 뭐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담당해야 하는 사역이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내게 두신 온전함이라면 은사다. 그것으로 주께 쓰임을 다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저 아이는 우리에게 두신 ‘평안의 매는 줄’이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다.
나는 그리 여겨졌다. 어찌됐든 아이로 인해 30여년 만에 은*원에 연락이 닿았다. 반갑기도 하고 새삼 계면쩍기도 하지만 두어 친구와도 새로 연결이 되었다. 실은 구차스럽고 답답하여 더는 외면하고 지냈던 이들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내 안에는 알게 모르게 빚진 마음이 있다. 한참 힘들었던 사춘기시절, 나에게 은*원이란 곳은 채찍과 당근 같은 곳이었다. 까부라져 무기력해하다가도 저들 앞에 가면 나의 신세한탄은 부끄러움이 되었다. 배부른 소리고 철딱서니 없는 투정이 되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외면하고 살았던 세월이었으니, 새삼 아이 때문에도,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려는 게 아닌가? 한 친구는 교회를 떠났고 한 친구는 믿음이 좋아보였다. 만나고 싶은 마음에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하고 내가 은*원으로 갈 거였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천둥번개가 치면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불안이 엄습하였고,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데 친구가 먼저 전화를 하여 다음으로 날짜를 옮겼다.
결코 저들을 괜히 두시는 게 아니다. 어쩌다 너와 나는 없다. 우리는 필연이다. 어떤 만남도 숨은 가치가 있다. 심지어는 내게 불만을 갖고 있다 해도, 구차하게 구는 이에게까지도,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사랑의 첫인상은 배려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롬 14:2).” 과연 저 아이가 뭘 알아서 하나님을 찾는 것일까? 하는, 이보다 더 교만하고 어리석은 판단이 또 있을까? 만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막 9:42).” 함부로 생각하지 말자. 누구를 어찌 대하고 뭐라 판단하지 말자.
결국 바로도 바로로 쓰시기 위해 바로로 세우셨다. 저가 결국은 아홉 가지의 재앙을 겪으면서까지 그 완악함도 주가 쓰시는 바라. 비로소 출애굽이다. 하물며 우리의 소소한 일상 가운데 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득바득 기를 쓰고 이기려고 하는 것이 어찌 선할까?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 내가 좋은 것이 행여 저에게 걸림이 된다면 기꺼이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그럴 수 있기 위해서도 나는 종종 호구가 돼야 한다. 그러해서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이 말씀이 나의 표제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종종 참 엄청난 사투다.
중3 아이가 네 시가 다 되어도 안 왔다. 어느 친구가 두 시쯤 온다고 하는 걸 세 시에 수업이 있어 다음 날로 미루었던 것이다. 비가 그쳐 늦게라도 은*원에 가려고 한 걸 아이 수업 때문에 어쩔 수 없던 일이다. 그런데 연락도 없이 또(!) 안 오는 것이다. 문자를 하자 한참 뒤에 답이 왔다. 시험 때는 안 가는 줄 알았단다. 아직 한 달도 더 남은 시험 핑계를 댄다. 속에서 화딱지가 나고 쌍욕이 올라오는데도, 어쩌겠나?
무슨 일로 구청에 전화를 걸어 어떤 일을 문의하는데 무려 여섯 군데로 전화를 다시 해야 했다. 저마다 자기 소관이 아니라거나 그 업무부서가 다르다며 미루는 것이다. 결국은 내가 졌다. 뭐라 정색을 하면 싸우자고 드는 일이고, 저들은 자기들 업부 소관이 아니라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한들. 옛날 같으면 분풀이하듯 데데거렸을 텐데 관뒀다. 내가 지고 마는 게 이기는 거다. 이처럼 보잘것없는 것에서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 20:7-8).” 주를 바란다는 건 때로 비루하다. 너무 없어 보인다. 빙충맞다. 초라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의 몸에서 잉태되어 ‘아기’ 예수로 오실 생각을 하셨을까? 고작 고아와 창녀와 세리와 가난한 어부들과 어울리셨을까? 어떻게 무력하게도 십자가에 달리실 결말이었을까?
내 의지, 내 수고와 노력을 모두 의지하지 못하게 하실 때까지 하나님은 종종 침묵하신다. 침묵하시는 동안에도 대신하여 누구를 붙이시고 곁을 같이 하게 하셨던 것이었으니, 나는 늘 인복이 많았다는 것을 잘 안다. 결국은 이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내게 두시는 이 필연적인 승리의 개가를 찬송한다. 내 비록 가난한 자 같으나 남을 부요하게 하고, 가진 게 없는 자 같으나 모자람이 없어 넉넉하게 나누어주고, 제 육신 하나 추스를 형편도 못되어 힘에 겨운 듯하나 오히려 온전치 못한 이들을 건사하고, 말 그대로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자 같으나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주 앞에 인도하는 자이다. 곧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5).”
나는 개개의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 가운데 칭찬과 격려가 내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8).” 내 이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생이었으면 좋겠다. 종일 저 아이 하나 생각하느라 하는 것도 없는 주제이지만,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10).”
아이로 인해 내가 늘 새 힘을 얻는 것을 안다. 나의 어려움과 곤고함으로 온전한 찬송을 배우고 익히는 중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11).” 결국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 그러므로 나는 주께 아이를 생각하며 기도한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4).”
곧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5).” 아멘.
덧붙임.
2018년 10월 23일
계절의 변화와 오늘의 뜻과 웃는추억
나는 22살 김*수이다 나는 2시까지 마띠아 제빵공장에 나가야하는 청년이다 학습한지 2일째다 엄청 따분한 날씨가 예상됬지만 아침부터 일어났더니 안개가껴있었다
나는 옛날과 다르게 바로 성경책과 ccm노래를 켜놓고 잠시 멍때리다가 성경공부를 하기위하여 캘라그라피를 준비하고 성경책을 손 가는대로 읽었다 비로소 성경말씀은 창설할지 없으나 그뜻을 캘라그라피로 마음다잡고 오늘하루도 잘해보자는 의미로 성경말씀 몇개를 통독하고 내맘대로 말씀을 기억나는대로 하나님과 영접해가면서 피아노치고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나님은 개인생각이지만 피아노치면서 고난과 시간과 횡패의 방어막이 되시고 자유와 통치를 주셨다 아직도 말씀을쓰고 읽을때 상상한 감성과 예수님의 얼굴이 떠올른다 그말씀을 스스로 쓰고 읽고 있던중 번개가 쳤고 눈이 가리키는 방향과 번개가 치는 방향의 시간과 속도가 일치했다 눈이 시원했다 왠지모른다 눈이 시원했다 뻥뚤린 기분이였다 . 그렇게 아침에 캘라그라피 7장정도를 쓰고 모든것을 내려놓고 일치하는 하나님의 방향대로 살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렇게 시간이 1시간정도 흘러 엄마는 아침식사를 드시고 아침을 챙겨주고 나가셨다 나는 그것을 먹으려 했으나 밥맛이 별로 없었지만 만두국을 맛있게 먹고 엄마가나가는것을확인한뒤 다시 앉아서 손의 힘과 집중력을 기르기위해 엄마가 사다준 색종이잘르는책을 펴서 찢어서 종이로 모양을 만들었다 모양은 자동차도있고꽂도있고 가방도 있었다 가위로 종이를 자를때 시원해지는느낌을 받았고 오늘 살아갈 길에 대해서 고민도 많이했다 원래 아침에 기도를 해야 마음이 안정되는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고 목사님 생각도 편하고 창의적인 생각은 기분좋은뿌듯함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되새기며 일상생활에 안착을 하기위해 마음을 놓았다 편안해질때쯤 11시반이였다 점심을 먹을시간이여서 콘프러스트와 우유를 먹고 나는 기분좋게 집에서 옷도 갈아입어보고 인스타그램도 해보고 제빵에서 잘적응할수있게 마음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1시가되서 나는 슬슬 자리를뜨기위하여 버스를 타고 1시 30분까지 남동공단에서 내렸다 1시가되서 버스를 타는순간 522르를 탔어야되는데 그냥가서 당황해서 63번을 타고 신연수역에 내려서 남동공단까지 걸어어갔다 근데 버스 시간차이때문에 벼별로 시간에 지장은 받지 않았다 오늘은 23살인 형준이형과 어제 같이박스 포장한 누나가 오신다고 했다. 누나와와 형을 본순간 반가웠다 왜냐면 나는 그 형준이형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직업훈련할때 같이 있었기때문이다. 그렇게 수다떨다가 금새 친해지고 많이 가르켜주셨다 형준이형은 대단히 집중도잘잘하고 듬직한 형이다 형은 굉장히 따사로운분이시다 누나는 착실하신분이다 나는 성실한 사람인것 같다는 소리를 듣긴 하지만 하하;;
아무튼 그렇게 같이 일하다가 평소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직업훈련을 4시까지 별 지장 없이 깔끔히 했다 . 그러고 4시10분까지 쉬는시간이여서 이모님들이 오셔서 먹을것을 내주었다 마카롱과 빵과 카스테라와 치즈캐익이였다 엄청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지혜롭게 시간은 흘러갔고 형준이형에게 친해지고 싶은 분위기여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것과 싫어하는것을 분별할줄알고 좋아하는관심사에대하여도 많이 공감했다 그렇게 4시 50분이 되어서 한치없이 끝나자마자 쌩하고 우리는 이모님들과 사장님과 남성 제제빵원님에게 마무리 인사까지깔끔히 마 치고 쌤도 데리러 오셔서 같이 갔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신연수역에가서 집까지 그냥 걸어갔다 나는 호기심이많아서 뭐하나라도 걸려라는 감성정인 방법들이 머릿속에서 생각나면 그일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의 흐름을 따르는 편이여서 노래를 들으며 건강한마음으로 집까지갔다
이렇게 일기를 많이 써보는것도 처음이지만 목사님의 말씀이 옳으신말씀인것 같다 왜냐면 버릴것은 아무것도 없는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의 정체성은 다양하고 존중해야하고 자아도 사랑해야되지만 하나님앞에서는 무너져 벽을 쌓지말고 항상 편한 발자취를 일찍 찾는사람이 행복을 더빨리 느끼는것같은 오감도 없지않아 있는것같고 소망으로 빛을 내는 사람도 있다는것을 알리고싶다
내삶의발자취는 아직 정하지않았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는사람이다 올바른 편견을 찾는다는것은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꿈과 소망이 옳바른 편견을 추억으로 되살려주기때문에 나는 항상 하나님에게 의지한다 어릴땐 몰랐었지.. 이렇게 한탄하는 생각들도
눈이와 바람이 불어 추워지면 집에 들어가 아 따뜻하다~~ 이렇게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렇지않다는것을 알리고싶고
자존감을 앞세워 세월의 흐름대로 따라가는 인생이 될수있다면 그것보다 훌룽하고 공손한 사람은 성공했다고 봐야할것같다
오늘 실수는 사람들의 사랑을 담아둔다는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것은 지금은 6시 반이고 밤이다 가을이고 춥다 그렇기에 걔절의 흐름을 따라가는 삶도 호기심있게 갈등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충만해야 그다음날도 세월의 흐름 ,,, 아니 현실속에서 충만한 삶의 대가가 상으로 찾아올수있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오늘 일기는 아직 할것이 있기에 이렇게 행복을앞써 그만한다.
외형 내형 기술 능력 정신력 사람이 느끼는 감정도 행복의 흐름이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랑은 눈물도 될수있는것 같다. 2018년 10월 23일 오늘의 날을끝내며
마음가는대로 내일도 알차고착실하고 공손하고 성실하게~ 사랑과 행복은 소망과 빛으로 어둠을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