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요한계시록 6: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이기고 또 이긴다. 우리의 승리는 기정사실이다. 이는 어느 말세의 때에 일어날 일이 아니고, 심판의 그 때에나 당하는 일에 대해서도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로 학습하게 하시는 이가 우리의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신다. 이에 내가 보니,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 복음의 승리는 불변하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등에 타셨다. 자비와 사랑을 무시하고 더욱 완악하여지는 세대를 향하여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오늘은 말씀을 여러 번 읽으면서 두렵다.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과 비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커진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아이의 시간을 좀 더 짜임새 있게 관리하기로 하였다. 목표는 방통대나 사이버대학교를 지원하는 것인데, 그것보다 동기부여가 중요하였다.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전형적인 무논리증을 동반하였다. 양극성장애로 비롯된 아이의 다음 단계여서 와해된 언어는 그 사고를 어지럽히고 어쩔 땐 망상을 더하였다. 조심스러우며 두려운 일이었으나 그럼에도 나에게 보내시는 덴 말씀 때문일 거였다.
무엇보다 앞서 기도를 하고 다른 것에 우선하여 말씀을 읽었다. 읽은 것에 대해 자신의 생활과 연관지어 작문을 시켰는데, 이해하지 못하고 기도문을 썼다. 괜찮다 괜찮다하며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기도하였다. 우리의 일교시다. 다음은 학습능력과 두뇌운동을 위해 영어와 수학을 하였다. 수준을 논할 것은 아니고 아이는 사고하고 분해하며, 우리의 이교시다. 그런 뒤 삼교시는 공작을 한다. 긋고, 그리고, 만들고, 오리고, 붙이고, 접고 하면서 아이의 손가락 근육을 길러준다.
관심이 가는 만큼 찾아보게 되고 찾아보는 만큼 알게 되며 아는 만큼 하게 되는 것이다. 하필 그 시간에 비가 많이 와서 서로 긴장하였다. 짜장면을 시켜먹고 아이를 배웅하는데 차로 데려다 준다, 같이 버스정류장까지 간다는 걸 아이는 국구 사양하며 혼자 해보겠다고 하였다. 어째서 그러는지 안다. 아이의 마음씀이 여느 건강하다는 사람보다 선하다. 가야하는 길과 거리뷰를 캡처해서 아이의 카톡에 차례로 올려주었다. 어디서 내리고, 얼마큼 앞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돌아 얼마큼 가야하고.
자꾸 짠하다. 생각 같아선 무턱대고 데려다주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다. 다행히 아이는 버스를 타고 내리고, 무사히 헤매지 않고 공장에 도착한 것까지 문자로 알려주었다. 서로의 일상이 눈물겹다. 아이의 모친은 염려되어 문자를 주고, 나 역시 아이의 문자를 기다리는 동안 노심초사다. 아이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최전방에 서 있었다. 별 거 아닌 것이 이처럼 고단한 일이어서.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 6:2).” 오늘의 말씀은 환희다. 기쁨이다. 이기고 또 이긴다. 결국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모두의 세계는 다르다. 각자의 영역에서 그 행동반경의 삶을 사는 일이다. 동기 목사는 결국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고 남은 삶을 마감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 들었다.
당사자의 세계는 어떨까? 그 가족의 행동반경은 어디까지일까? 나는 그저 주의 인자하심으로 저들에게 평안이 있기를 기도하였다. 살고 죽는 일이 한 꺼풀이라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 어렵다. 나는 가늠할 수 없는 저의 세계를 두고 가슴 졸일 뿐 더는 느낄 수도 없는 세계였다. 그렇듯 서로의 세계가 다르다. 고통의 무게도 다르다. 슬픔의 결도 그 범위의 동요도 다르다. 그럼에도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러하다.
아이 곁에서 아이와 같이 놀라고 긴장하여 자꾸 똥이 마렵고 마음을 졸이는 일이지만, 아이는 아이의 세계를 산다. 이를 두고 병리학적으로 망상이라 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저마다의 망상이다. 할 말이 없어진다. 췌장암으로 고통의 최전방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는 이의 세계와 이를 지켜보며 가슴을 쥐어짜는 나이어린 사모의 슬픈 세계는 다르다. 그러니 세 자녀의 세계가 다르고 일가친척의 세계가 다르고 이를 전해 듣고 안타까움을 표하는 나의 세계가 다르다.
너는 누구냐? 성경은 묻는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각자의 세계는 저울로 잴 수 없고 무게로 가늠할 길 없다. 오직 그 세계를 세우시는 권능은 주께 있다. 나는 동기들 카톡방에 주의 자비와 긍휼로 평안을 구하였고, 돌아앉아 저희가 당면하고 있는 세계를 알 길이 없어 조바심이 났다.
아이엄마의 노파심이 나의 조바심과 같을 수 없듯이 아이는 아이에게 맡기신 세계를 살고 있을 뿐이다. 스물두 살 청년에게 선긋기와 오리기, 분수의 덧셈 뺄셈과 막연한 기도문의 작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를 세우시는 권능은 주께 있다.’ 우린 다만 오래 참음이다. 그렇게 권면하고 권계하며 격려하고 같이 간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결국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루하루는 지극히 개별적이어서 부부 사이도 부모자식 사이에도 그 세계는 엄연하여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당사자와 이를 곁에서 지켜보며 슬퍼하는 가족들의 세계는 엄연히 다르다. 나아가 이를 전해들은 나로서는 그 슬픔의 정도를 짐작할 수조차 없이 또 다른 세계에 머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롬 14:5).”
각각 자기의 마음으로 무엇을 확정할 것인가? 그럼에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는 것. 그러므로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 곧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이를 카톡으로 전해들은 나로서도, 우리가 하나일 수 있는 것은 '주는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각각 별개의 세계에서 사는 것은 처음 사람의 타락으로 인한 분해다. 분열이다. 같은 하나님을 두고 가인의 세계가 다르고 아벨의 세계는 다르다.
물끄러미 아이를 지켜보며 자꾸 울컥울컥하는 마음으로 주께 되뇌었다. 이로써 우리에게 원하시는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다. 그 세계다. 본래 우리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의 나라다. 사랑이 완성되어진 나라. 하나님과 하나 된 나라. 나는 문득 천국을 그리 이해하였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 세계와 하나 돼야 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었다.
도대체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디서 어떤 기능이 자꾸 혼선을 빚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알 수 없어서 더욱 경이로웠다. 아이가 주를 바라고 내가 주를 바라는 우리의 주는 하나이셨다. 내가 아이를 마음 쓰고 아이가 비 온다면서 혼자 갈 수 있다고 극구 나를 마음 쓰는 그 마음들이 하나였다. 그렇게 잠깐씩 주의 마음을 맛보아 알 수 있었다. 늘어져 있다 동기 목사의 소식을 듣고 자세를 고쳐 앉아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누가 또 그러했을 그 순간과 순간이 하나 되는 나라.
이를 위하여 우리 각자의 삶에서 흰말을 탄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기고 또 이기게 하신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우리는 어쩌면 각각의 세계를 허물고 또 허물면서 하나 되는 세계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슬픔도 기쁨도, 우리의 바람도 또는 실망도 모두 주의 세계에서는 하나이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 58:2).” 우리의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무엇도 비극일 수 없고 무엇도 슬픔이지 않다. 이는 무엇도 기쁨이지 않고 무엇도 즐거움이 될 수 없다. ‘주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으로 통일 되는 나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당사자도, 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저의 아내와 세 어린 자녀들도, 그와 같은 소식을 멀리서 전해 듣고 안타까움으로 마음을 쓸어내리는 정도의 나에게도,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나라.
새삼스럽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6:19-20).” 우리가 하나 되는 나라에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있는 나라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0:31).” 이는 결국 우리의 세계다. 나의 세계다. 하나님의 세계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 곧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