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전봉석 2018. 11. 1. 07:14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요한계시록 11:17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시편 28:6

 

 

전날에 아이는 마음이 상한 일이 있었다. 아이엄마는 일찍 문자를 주었다. 복지사 말로는 누구와 시비가 있었는데 아이 잘못이 아니란다. 한데 녀석은 또 컨디션도 꽝이었다. 코감기에 몸살까지 겹쳐 더 그랬을까? 여느 날 보다 조금 늦게 왔다. 아이엄마의 말만 듣고 일부러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일기를 쓰게 했으나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나중에 물으니 내가 걱정할까봐 말을 조심한 거였다.

 

하나님 죽여주세요, 빨리 이 자리를 떠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것 같더란다. 커피를 쏟아 같이 일하는 누나 옷을 더럽힌 형에게 얘가 뭐라 했더니, 궁실거리며 자신에게 그러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순간 속이 울렁거리고 토하고 싶고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떤 공포에 사로잡혀, 망상은 아이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를 엄습한다. 실제 그렇게 들렸다고 했다가 그리 말한 것 같다고 했다가 저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가. 그런 아이를 어르며 나까지 싸한 것이다.

 

같이 시편 36편을 읽었다. 아이 손을 잡고 기도하였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 아뢰고 구하고 위하고 곁을 함께 하는 것일 뿐. 어찌 더는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나는 막연하여서 생각하기를 물렸다. 성경을 쓰고 작문을 하고, 이런저런 격려를 하다가도 주 앞에 드는 생각 또한 우리의 망상이지 않을까, 하는 회의감. 같이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듯 아이와 함께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걷기에 참 좋은 날씨였다.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 11:17).” 잘 몰라도 된다. 행여 그릇된 길로 행하여도 된다. 전능하신 주가 통치하신다. 다만 ‘말씀하신 대로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창 21:1).” 우리는 고백할 것이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6).”

 

웃을 수 없는 중에 웃게 하신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웃음이다. 덩달아 마음이 조이고 어떤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 같더니, 그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하게 하시려는 거였다. 아이가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고 천천히 걸어 양지바른 곳으로만 걸어서 왔다. 그리 여겨지는 마음이 괜한 망상이거나 엄연한 사실이거나. 어쩌면 우린 모두 종이 한 장 차이의 생각을 사이에 두고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 두신 삶은 작은 일, 큰 일이 따로 없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 14:13).” 아이는 아이에게 맡기신 생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각자의 삶은 지극히 개별적이어서 ‘하나님과 나 사이’를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아이엄마도 아이를 다 알 수 없고 대신 살아줄 수 없다. 하나님도 대신 살아주지 않으신다. 그 삶을 두고 무게를 측정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누구보다 못한 것 같고 또는 조금은 더 나은 것 같은 따위의 견줌이 가장 고약한 망상이어서, 저 혼자 피해망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온전하다고 여기는 자의 망상이 가장 구질구질하다. 우리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성경은 이를 강조한다. 그러할 때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보잘것없는 것에서 큰 영광이 나오는 것이다.

 

그 영광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니, 누구는 이성적으로 우습다고 여긴다. 그러면 누군 주관적으로 사실 여부를 고려한다. 아이의 질환이 망상에 젖는 병이라면 나는 그 일을 주관하실 이가 하나님이심을 가르치며 아이의 손을 잡는다. 섬뜩하고 어떤 무서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이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긴장한다. 그러면서도 그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정작 그 일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8).” 우리가 판단하는 크다, 작다는 구분이 어리석었다. 아무리 양지바른 곳으로만 걷는다고 걸었는데 그늘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바람이 차가웠다. 그 길목에 앉아 사람들이 담배를 태웠고, 발을 종종거리며 재잘거렸다. 왁자한 소리가 불안하게 울렸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바랄 수 있다는 게 복인 것을 알았다. 글방에 올라오자 따스한 햇살이 가득하여 별개의 세상 같았다. 그 어떤 일도 우리에게 맡기신 이가 전능하심으로 작은 일, 큰 일이 구분이 없다. 사는 게 곧 사역이라. 주가 맡기신 날을 아이는 온몸으로 맞서는 것이었고, 그 예민함은 저를 몸서리치게 하는 고달픔이었다.

 

어쩌겠나? 뭐라 할 거 없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행여 가장 조심할 것은 정작 나의 부정적인 말이라. 말은 마음을 다스려 생각을 지배하기 일쑤다. 그래서 요즘은 아내에게 아이에 대해 말할 때도 조심한다. 그 말이 내가 지탱해야 하는 무게가 되기 때문이다. 못하겠어! 하면 그만큼의 무게로 짓눌리는 것이다.

 

도대체 이 혀를 길들이 재간이 없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 그래서 점점 누구와 의논하는 것도 줄인다. 뭐라 말하다보면 내 자랑이 되어 나를 돋보이게 하고 있거나 저를 멸시하여 불쌍하고 고약한 자리에 놓기 일쑤라. 정작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데, 그렇다면 입을 열어 놀리는 혀는 하나님을 조롱하기 십상이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부정적인 말은 어느새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려 드는 것이다.

 

부쩍 감사한 것은 나의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것이다.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계실 이시다. 오늘 말씀으로 안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고작 오십여 년을 살았다고 해서 마치 인생을 좀 아는 것처럼 굴기 일쑤인데,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 11:17).” 주가 나의 왕이셔서 다행이다.

 

그리하여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시 28:6).” 누구에게 뭐라 말하려다 보면 저절로 그리 되어, 자랑이거나 누구 험담이거나 하는 나의 이 세 치 혀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어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말씀 앞에 자중하기를. 말씀만으로 온전하기를. 그런저런 염려밖에 없는 아이엄마에게 나는 위로하였다. 괜찮다. 일보시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아이가 스케치북에 선긋기와 색칠하기를 마친 후에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잘했다 잘했다 나는 다만 박수를 쳐주며 응원한다. 스물두 살 청년이 그러고 있는 게,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그와 같은 회의감을 주께 돌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주의 이름으로 아이를 돋우고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일 뿐.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 무엇을 지킨다는 것은 이를 돌본다는 소리다. 방치도 보관도 아니다. 오히려 활용이다. 그 아름다운 것, 우리에게 맡기신 한 생을 다하는 동안의 수고와 애씀을 이제 나는 사랑한다. 아이로 인해 내가 배우는 게 많다.

 

그저 다만 나는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누구처럼, 어떤 일에, 무슨 수로, 뭐라도, 어떻게 연연해하지 않는 일이 귀하였다. 그저 다만 이 보잘것없는 생이 주께 쓰임이 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그렇게 한 날을 다할 수 있다는 게 복이었다.

 

이는,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시 28:7).” 나로 웃게 하심이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더니 듣는 자가 다 같이 웃게 하신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8).” 결국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9).”

 

두려워할 거 없다. 조급해할 일도 아니다. 다들 저마다 각각의 망상에 젖어 사는 세상에서, 우리로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1).” 이는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