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전봉석 2018. 11. 8. 07:20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요한계시록 18:8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35:28

 

 

이제 초딩 3학년 아이가 얼굴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왔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줄 알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아이엄마가 때린 것이다. 효자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갈겼다. 공부를 마치고 아이가 엄마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하였다. 쌀쌀맞은 목소리가 무안할 정도로 아이를 면박을 주고 집에 가 있으라고 윽박질렀다. 아내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다 울먹거렸다.

 

마가렛 피더슨 해딕스가 쓴 <이 일기를 읽지 마세요 선생님>이 생각났다. 아내와 딸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이 집을 나갔다. 엄마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그 기다림은 자포자기상태로 몰아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만든다. 늘 엄마의 분풀이로 매를 맞는 티시, 그 누나에게 집착하듯 매달리는 동생 매트. 던프리 선생은 아이들에게 일기를 쓰게 하고, 혹시 그 내용을 읽지 않길 바라면 그 위에 ‘이 일기는 읽지 마세요.’라고 적게 한다.

 

우리가 뭐라 예단할 수 없다. 저녁에 만나면 낮 동안에 있었던 일을 서로 들려준다. 아내 이야기의 대부분도 아이들 사연이다. 나 역시 오늘 아이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려준다. 그리고 딸애가 퇴근해서 오면 같이 예배를 드린다. 이미 우리 마음은 ‘하나님 아니면 안 되겠습니다.’ 하는 것으로 변해 있다. 우리가 당해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계 18:7).”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8).” 오히려 두려움은 우리 몫이다. 아이는 발랄하고 명랑하다. 저는 언제부터 글방 가요? 하면서 기다린다. 어른들 시각으로는 눈치가 없다. 주책이다. 오만 참견을 다한다. 그래도 아직, 아이다. 지난 해 겨울 두 달 정도 특강으로 해서 글방에 오게 한 적이 있었다. 너무 어린 탓에 아이들 엄마가 일일이 오며가며 데려다줘야 해서 계속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내가 같이 와 있어야 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아이들을 병적으로 조심스러워한다.

 

어제는 중3 아이는 눈이 마주쳤는데 외면하고 딴청을 했다. 어떤 서운함이 일었으나 뭐라 말하지 않았다. 더는 어쩔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하는데, 나 혼자 연애하는 사람처럼 애태우는 꼴이 됐다. 지난 주일에 같이 오지 못한 초딩 5학년 녀석은 행여 우리의 관심을 잃을까봐 눈치를 살폈다. 잘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그걸 악착스럽게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자꾸 병이 난다. 다른 누굴 조금만 신경 써도 아이가 긴장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병들었다. 그 부모 중 누구도 아프다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곁에 두시는 것에 대해 더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장하지도 않고 예단하거나 속단하지도 않는다. 똥싸개 아이는 받아쓰기를 또 빵점을 받았다. 엄마가 외국인이라 한국말을 잘 못한다. 아빠는 늘 피곤에 지쳐 우악스럽다. 아내는 아이를 야단치지 마시라고 아이아빠에게 대신 문자를 넣었다. 자꾸 똥을 싸고 오는 게 괜한 게 아니다. 보면 다들 그 부모가 병이 들었다. 영혼이 상한 것이라, 한데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엄마에게 아이 일을 말하거나 묻기가 어렵다. 너무 과하게 고마워한다. 부담스러운 것이다. 무슨 행사가 있어 복지관으로 가야 하는 날인데, 녀석은 까먹고 있다가 문자를 받았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반! 순간 불안해졌다. 다행히 짜장면이 일찍 왔다. ‘길찾기’를 통해 어떻게 가야 하는지, 한 장 한 장 캡처하여 그 순서대로 아이 카톡에 올려주었다. 오히려 아이가 집에서 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고 가까웠다. 그런데도 조바심은 병적이라, 불안으로 쩔쩔매는 것이다. 지하철까지 데려다주고 나의 불안도 가시지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하나님은 그리 맡기실 것이다. ‘소망이 없는 시대에 우리의 소망에 대하여’ 설교원고 초안을 잡았다. 본문을 분해하고 관련 성구를 찾았다.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이 정작 우리 자신이었다. 그 아집과 자기 주관이 하나님의 통치를 훼방하는 것이다. 대놓고 ‘종교적인 시각’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뭐라 어찌 다가갈 수조차 없다. 또는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교회를 비판하고 누구를 뭐라 경계하는 것을 마치 신앙의 기조로 삼는 경우는 더욱 고약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저들을 ‘받고’ 뿐만 아니라 ‘담당’해야 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4:1, 15:1).” 두 말씀은 각각의 장에서 첫 구절로 놓였다. 뭐라 할 게 아니라 받아야 한다. 우리의 받음은 우리가 저처럼 받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15:7).” 곧 우리의 받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다.

 

저를 받는 것은 선을 이루는 일이고, 더불어 열방의 본이 되어 덕을 세우는 일이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2).”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누구에 대해 뭐라 비판하기 쉽다. 아이 말만 듣고 그 부모를, 그 엄마 말만 듣고 아이를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지 않기를, 우리는 예배 때마다 간구한다. 주가 맡기신 것이면 또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더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데 나는 또 실패한다. 아무래도 중3 아이가 마음을 닫는 것 같다. 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며 아내를 설득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유아기적 단계를 지나 성숙의 단계로 가는 첫 관문이 ‘안 돼!’이다. 그 전에는 그저 오냐오냐 하던 시절의 반감이 깃든다. 뭐든 괜찮다고 하고 언제나 아이 편을 들어주었던 단계를 지나야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해져, ‘그러면 안 돼!’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아이는 이를 못 견뎌하고 오히려 단절을 경험한다.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주어도 자기 위주로 받아들인다. 그것으로 ‘안 돼’에 해당되는 저지를 거부하는 저항에 놓인다.

 

그렇게 설명을 하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그 책임을 아이에게 돌리고 있는 거였다. 그와 같은 미숙함의 정도는 부모의 것으로 답습된 일이어서 더는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며 혀를 내두르기까지 하였다. 왜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이제는 알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놓치고 자기의 의를 위해 ‘이만큼 했으니’ 어떤 결과를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아이 때문에 속상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서운하고 괘씸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해야 할 일을 단계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롬 15:8-12). 먼저는 우리로 그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와 찬송을 하게 하심이고(8-9), 저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같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고(10), 저들 스스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게 되는 단계에 이르러(11), 그들의 잃어버린 소망이 회복되게 하는 것이었다(12). 이는 곧 이방인들을 주의 긍휼하심으로 돌보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한 거였다(8-9).

 

이를 우리가 준행할 수 있는 방법은 말씀으로 교훈을 삼아 인내와 위로로 예수를 본받는 길이었다(4-6). 곧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를 인내하게 하시고 위로하심으로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신다(5).

 

이는 곧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6).” 가정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가 낮 동안에 있었던 아이들과의 일을 얘기 나누다 보면, 결론은 소망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 아이 부모를 변화시킬 것이겠으며 무슨 수로 아이 마음을 움직여 마음대로 열거나 돌이켜 주를 바라게 할 수 있겠나? 못하겠어요! 하는 마음이 일 때면, 그런 나를 주님이 받으셨다는 것!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나야말로 구제불능이었지 않나. 소망의 하나님은 나를 두고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신다. 그리하여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 그러기 위해 성경의 위로와 인내로 성령은 우리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신다.

 

아이들을 위하고 돌보되 아이들을 보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 부모를 생각해서 하는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러다 훌쩍 또 떠나버리면 그만인 시간 동안에 우리에게 두신 일이라, 하나님의 일이라,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소망을 거두시지 않는 동안에 맡은 바 사역이었다. 늘 엄살처럼 내가 죽을 것 같다가도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또한 감당하게도 하시는 거였다.

 

그러므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35: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