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9:5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편 36:7
모든 말의 주어가 나였다가 하나님으로 바뀌면서, 우리의 잃어버린 소망을 회복하게 된다. 시편 108편에서 내가 그러하였다가 주가 아니시면 안 된다는 것을 묵상하였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1).” 그리 자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새벽을 깨울 것이라 여겼다. 내 의지로 또는 각오와 다짐으로 거뜬히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2).”
누구와 견주어도 그 중에서 나는 주를 찬송하리라 자부하였다.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3).” 이와 같은 나의 의식적인 행위가 보란 듯 주 앞에서 자랑이 될 줄 알았다.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4).” 그런데 일은 자꾸 꼬이고 잘한다고 한 게 더 일을 망치고 있는 꼴이었으니, 정작 그런 가운데서 내가 높임을 받기를 원하였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5-6).” 돌이켜 주께 영광을 올릴 때, 나의 주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된다. 도대체 싫다는데 자꾸 더 에돔으로 인도함이 그래서였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읍으로 인도해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으로 인도할꼬(10).” 내가 싫어하는, 볼 때마다 내가 보이는 저 아이 앞에서 나는 신음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11).” 나를 내몰아 내가 싫어하는 사람 앞에 세우시고 그 일과 맞닥뜨리게 하시는 것이 다 그래서였다. 결국은 주의 도움밖에 없다는 것.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2).” 결국 그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실 일이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13).”
기도 없이 성경은 영혼을 울릴 수 없고, 성경 없는 기도는 내용 없는 껍데기일 수밖에 없다. 둘은 결국 함께 가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가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어떤 의심도 거두고 ‘그냥 한다.’ 여느 날보다 일찍 와도 또는 늦었어도, 시편을 같이 읽고 묵상하고 글자로 옮겨 적고 기도를 한다. 이제는 마땅히 그리 여겨져서 우리 초딩 아이들도 오면 각자 작은 성경을 하나씩 든다. 아이들과는 잠언이다. 어린 것들이 각각 한 구절씩 옮겨 적고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게 기특하다.
그렇게 자기 이야기로 가져간 말씀은 은연중에 주어를 바꾸어놓는다. 내가, 내 마음으로 다 할 줄 알았는데, 주어가 바뀌고 나면 에돔이 내가 무찔러야 하는 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상대하실 적이라는 데 두 손을 든다. 다만 내 곁에 두시는 적이라. 실은 나도 내가 감당하지 못할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특별히 목요일은 또 종일 아이들과 같이 있는 날이기도 한 거여서, 누구는 받고 누구는 버리는 데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순응을 배우기도 한다.
의외다. 종종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변화에 놀란다. 맡기심에서 소망을 찾는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주가 그리하셨다. 곧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저 아이를 참아야 하는지. 에돔에 당도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신기하게도 그게 나였다. 모르겠다. 나는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정도가 이 정도여서, 왜 나로 하여금 에돔으로 자꾸 이끄시는가, 그리 이해하였다.
날 닮은 아이였다. 그렇게 서로 종노릇하게 하심으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이내 우리가 주를 바라며 내 말을 주어가 전부 하나님이시었다는 걸 알게 한다. 조금 답답할 노릇이다. 멀어져서 속이 끓는가하면 가까이 밀착됨으로 그 무게가 더하다. 내가 어찌할꼬?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그러니 방법은 기도밖에 없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후 2:1).” 이 셋은 하나여서 감사할 수 없어 울분을 토해내던 심정이 기도가 되어 저를 위해 주께 구하고 있는 거였다. 아직 어려서, 그 부모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 아이는 한 번도 참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그래서 나로 여기에 두시는 거였다.
이내 저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그렇듯 우리로 곁을 지키게 하시는 일이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아내와 나는 이제 그리 여겨 마음을 다한다. 중2 여자아이도 주일에 교회를 오고 싶은데 혼자 사는 엄마의 집착이 놓아주질 않는다. 글방으로는 되는데 교회로는 안 된다고 딱 선을 긋는 일이어서.
그럼에도 아이를 대하는 일이 내 일이라. 신기하게도 아이가 글방에 오는 걸 좋아하고 나름 이제 마음을 열어 웃어주는 것으로 감사하였다. 이 일이 주를 바라는 나의 척도가 되어줄 줄이야. 대학 동기들 카톡방이 모처럼 활기를 띄었다. 누가 뒤늦게 등단을 하였고 누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잠시 귀국을 하였다. 겸사겸사 모임을 잡고 서로 지난 이야기를 풀어놓느라 왁자하였다. 나는 아이들과 있으면서 틈틈이 오가는 이야기를 볼 뿐 뭐라 끼어들어 거들 말이 없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서로 다른 세상 같았다. 그런 내게 말씀은 좌표를 잃지 않게 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행여 이는 ‘어떠하여도’의 나침반 같은 거였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도와주심을 믿고 있으나 설령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말씀이 나를 불러 세운다. 나의 가장 유약한 부분이 그리움이라. 그처럼 사람들을 좋아하고 누가 좋아해주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아이들과도 내가 좋아하길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숫기 없고 늘 눈치를 살피던 5학년 녀석이 슬그머니 내게 와서 주전부리를 하나 건넨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내가 먹던 비스킷 하나를 꺼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다만 이와 같은 정겨움을 사랑한다. 서로들 그리움을 토로하며 가뜩이나 못 본지 몇 십 년은 족히 넘은 내게 자꾸 그 자리에 나오라고 하는데, 못 가는 것이 안 가도 되는 이유여서 다행이었다. 그만하면 됐다. 지나간 것은 그리움으로 족하다. 우리의 사명은 현실에 있다. 지금 여기를 딛고 나아가는 것뿐이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설교원고를 위해 준비한 성경구절 구절들이 하나하나 내 걸음의 보폭을 이루는 것 같았다. 그러게. 나는 이처럼 아이들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곳에서 주께 예배할 수 있어서 복되다.’ 누구는 안 믿고 또는 타종교를 믿는 이들 사이에서의 화합은 술자리밖에 없었고 화두는 다만 여기서 사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는 왜 저들 이야기에 끼어들 수 없는가봤더니 이제 나의 주어가 바뀐 것이다. 나는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로 살고 있었다. 새삼 친구들 카톡방은 그걸 알게 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게 복이어서,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오늘 내 곁에 두시는 아이 하나, 저 고약한 에돔을 주의 사랑으로 품고 다투어야 하는 게 사명이었다. 것도 내가 책임지는 일은 아니어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주가 하실 것이다.
이때 주의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계 19:5).” 우리의 처음도 끝도 주를 찬송함에 있었다. 내가 이를 생각함은 주의 사랑을 알기 때문이고 저 아이로 인하여 수고하여 속을 태우는 일도 주를 나의 주어로 삶은 까닭이었다. 내가 저 아이를 좋아하고 저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사랑이었다.
아이는 또 복지카드를 잃어서 당황하였고, 나는 저의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워 주 앞에서 신음하였다. 그러할 때 또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이었으니, 우리가 피할 곳은 막연한 추상이나 개념이 아니라 실제였다. 곧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그러므로 내가 주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곧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는 것.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