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세기 5:2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시편 42:8
생의 이편과 저편의 간격이 아득하였다. 한편에선 30여년만의 만남을 즐거워하며 사진을 올렸고, 한편에서는 30여년 후반의 생을 마감해야 하는 마음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한 아이와 아이엄마는 단절을 하듯 그렇게 답을 주지 않았고, 한 아이엄마는 뜬금없이 고맙다며 모 제품의 원두커피를 선물로 가져왔다. 아들은 필리핀 대사관에 취업이 되었다고 연락을 주었고, 아이는 결국 이기지 못하고 공장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돈을 뽑아 옷을 사러 나갔다.
슬픔과 기쁨 사이, 이별과 만남 사이, 미움과 감사 사이에서 나는 그 간격이 너무도 까마득하여 아찔하였다. 마침 그때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읽고 있었고, 신대원 동기들 단체톡 방에 말씀을 옮겨 적고 위로를 전하였다. 말씀 붙들고 힘내는 수밖에.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아직 우리의 이야기는 다 끝난 게 아니었다. 곧 이르러 ‘무릇 시온에서’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반드시 위로가 있을 것이다. 마음을 뜯고 재를 뿌려 견디었던,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부어주실 것이다. 곧 우리의 ‘그 슬픔을 대신하여 찬송의 옷으로’ 갈아입혀 주실 것이다. 이내 살면서 지고 있던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우리에게 의의 나무로 이루게 하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으실 것이다.
마음이 좋으면서도 슬펐다. 환하면서도 어두웠고 즐거우면서도 속상했다. 어쩌면 이생의 이편과 저편의 간격은 마음의 거리가 아니겠나, 생각하였다. 우리가 복이 있다는 것은 결국 세 가지의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걷지 않고, 서지 않고, 앉지 않는다. 걷다, 서다, 앉다. 우리의 생을 축약하면 이 세 개의 동사로 정리되지 않을까? 모두가 의지적인 것이다.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다. 걷고, 서고, 기어이 앉아야 하는 게 또한 한 생의 사이클 같다. 처음 걸음마를 배우고 발을 떼고 걷기 시작했을 때의 환희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축복하고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어찌 걷기만 하겠나? 이내 서야 하고 걸어온 길을 돌아봐야 하는 때도 오는 것이다. 다시 기력을 다해 걸으려 해도 이제 그만 앉아야 할 때도 있는 것이고. 그러할 때, ‘악인의 꾀’와 ‘죄인들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로 걷지 않고, 서지 않고, 앉지 않는 게 복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력을 다하는 동기 목사의 깡마른 얼굴과 그 곁에서 눈물겨운 표정을 하고 있는 젊은 사모와 아직 어린 큰 아이의 모습도 같이 찍혔다. 저들이 이고 있는 재를 기쁨의 기름으로 바꾸어 부어주실 것을. 그 슬픔을 대신하여 찬송의 옷을 지어 입혀주실 것을. 의의 나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라 일컬음을 받게 하실 것을. 나는 올라온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처럼 우리가 걷고, 서고, 앉는 자리에서 주의 영광이 주렁주렁 의의 나무의 과실로 열매 맺혀지기를.
아이가 매일 아침마다 오면서 나는 우리 모두의 고질적인 죄의 습성을 마주하곤 한다. 병적으로 소비를 원한다. 갖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리는 것이다. 고작 2주 일 한 값으로 들어온 4만원을 가지고 아이는 좀이 쑤시는 것이다. 어디 제품으로 모자달린 무엇을 놓고 안달을 내는데, 나는 부러 내 생일인 것을 말하고 선물을 사보게 하였다. 늘 쪼들리며 힘겹게 돈을 버는 엄마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엔 그럼 엄마 것을 사보게 하려 하였다. 한데 그저 병적이라고 하기에는, 우리 또한 다를 바 없는 것이어서 누구를 대신하여 마음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알았어요, 했다가 금방 또 마음이 뒤집힌다. 네, 하고 금방 돌아서면 아니요, 하고 마는 것이다. 중3 아이는 오는 날짜에 맞춰 더는 아이엄마도 뭐라 답이 없었다. 아내는 허탈해하였고 나 역시 설마, 하던 마음이어서 씁쓸하였다. 우리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어찌 설명할 길이 없었다. 누구는 사경을 헤매고 그 슬픔에 겨운 가족들은 재를 뒤집어썼는데, 누구는 오랜만에 만난 자리라며 회포를 풀고 있었다. 서로 다른 두 장의 사진이 나를 하루 종일 어렵게 하였다. 걷고, 서고, 앉는 인생이 이처럼 각각의 것이어서 난감하였다.
무엇이 복인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묵상이란 표현을 나는 이제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필사적인 몸짓으로 이해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다른 무엇으로도 빼앗길 수 없는, 쥔 것을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누가 치려해도, 떠듦으로 뭐라 한대도 굴복하지 않을. 필사적이고 악착같은, 즐거움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복을 주셨고, 사람이라 일컬으셨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 5:2).” 같이 무엇을 도모하고 공유하는 것 같으나 걷고, 서고, 앉는 것은 기필코 각자의 것이어서. 나는 그 간격이 너무도 까마득하여 아득하였다. 감히 그 슬픔을 같이 한다 말할 수 없고, 그 힘듦을 나도 안다고 여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낮과 밤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나?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 42:8).” 주의 인자하심으로 우리의 기도는 이어지는 것이었다. 주님, 하고 되뇌며 누구를 위해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토해내듯 입을 삐쭉거리며 아뢰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한 아이는 가고 새로운 아이는 오고, 이걸 계속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싶은 회의와 갈등으로 마음은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았다.
그러니 내게 필요한 한 가지 일,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나는 말씀만 붙들기를. 누구의 위로도. 혹시나, 하는 어떤 바람도. 감정에 겨워 꺼이꺼이 토해내는 나의 기도도. 슬픔과 기쁨이 과장되는 찬양으로도. 사람들의 용기와 응원도. 나름의 위로와 확신도 모두 벗어버리고 오직 한 가지, 말씀만 붙들고 힘내시기를. 특히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고통에 겨워 정신이 혼미할 때 무엇으로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시 119:161).” 어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거였다. 금요일 오후, 습관처럼 청소기를 돌리로 물걸레질까지 마치고 난 뒤, 등짝에 흥건하게 땀이 배어 창을 열고 섰을 때의 오싹하던 한기처럼. 내가 이제 남은 날 동안 늘 느끼고 또 붙들고 기어이 놓지 말아야 할 한 가지,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무릇, 의당, 기어이, 이내, 주께서 인정하시는 길에서 부디 걷고, 서고, 앉을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