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전봉석 2018. 11. 19. 07:09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창세기 7:5, 16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시편 44:21

 

 

우리의 준행은 삶에서 구현되는 일이지 구호가 아니다. 살아온 날들이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각별한 마음으로 아이엄마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옛날, 부모로서 자식의 그러저러한 사정으로 힘들었던 세월에 대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어찌 이루시고 오늘에까지 이르게 하셨는가를 잠깐 언급하면서. 아이의 오늘을 그 영혼을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기를 권면하였다.

 

말씀을 들으며 내 안에 부드러운 마음을 더하셨다는 데 놀라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맡기신 한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기틀이 되게 하시는 거였다. 결국은 우리가 살아온 날을 통해 하나님을 의뢰하였던 날이 가장 귀하고 복된 것이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그것을 오늘에 이르러 지나온 우리의 날들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아이가 학습세례를 받음으로 감사하였다. 그 상태가 호전하여 낫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당연하겠으나, 그보다 더 귀한 주의 은밀한 계획하심이 있을 것을 확신하였다.

 

아이엄마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나는 은연중에 묻어나는 아버지의 깊은 아픔과 이해와 동정을 느낄 수 있었다. 곧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비밀한 것을 모르실 리 없다.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 44:21).”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래봐야 소용없을 어떤 서러움이나 고단한 삶의 피로함에 대하여서도. 우리의 걱정은 없어지고 결실을 이룰 것이다.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8).”

 

물가에 심어진 나무, 결국은 복 있는 사람이라.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비록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잎이 타들어가고 바람에 나는 겨와 다를 바 없어 폭풍우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으나.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오늘 우리의 삶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했더니 옛날, 부모의 날들이 그러므로 주를 의뢰하고 신뢰함으로 준행하였던 날들의 결실이구나.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게 어디 그처럼 간단한 일이었겠나? 12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장구한 날들의 세월 동안 온갖 수모와 핍박과 회의와 갈등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 밖의 시선은 물론 안에서 이는 고달픔과 서러움에 대하여는 말할 것도 없었을 세월이었을 텐데. 저는 그럼에도 준행하였다.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그리고 하나님이 그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

 

준행하였고 하나님이 이루신, 오늘 말씀이 어제 아버지가 아이엄마를 위로하며 들려주었던 우리 믿는 자들의 삶에 따른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아니겠나? 준행함이란 석연치 않은, 뭔가 불만이 있는, 마땅치 않은, 서러움이나 온갖 고달픔과 한심스러운 날들까지도 모두 꿀꺽, 삼켜버리는 결연함이 내포되어 있다.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겠으나 자발적이지 못한 부분까지도 이내 참고 견뎌내는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다. ‘표준이나 기준이 될 만한 것에 준하여 그대로 밀고 나가는, 행함이다.’

 

노아의 준행, 하나님의 결말. 기어이 방주를 짓고 들어가고, 이내 이를 닫고 한 이야기를 마무리하시는 하나님의 결연한 손길. ‘그를 들여보내시고 문을 닫으시니라.’ 저의 ‘좇아서 그대로 행한, 준행함’이 없었다면 이 일 또한 가능하였겠나?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표준, 기준, 전례와 명령을 좇아 그대로 행하는 삶이 가장 복되었다. ‘그런 자식’을 맡기신 하나님의 섭리. 그 처한 상황이 말도 안 되고 이해할 수도 없어 그저 고달프기만 한 것 같으나 말씀 붙들고 묵묵히 ‘영구준행(永久準行)하는 삶’으로의 묵묵함이 우리의 결실이 되는 거였다.

 

누가 오고 안 오고. 겨우 누가 오고 또는 안 오고. 이 일이 작고 크고. 고작 작고 보잘것없어서 뭐라 말하기도 민망한 일인 것 같으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일생을 바쳐 준행하였던 방주로 인해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맥을 잇고 더해져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일이었다. 우리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이야기에 여전히 우리는 소개되고 초대되어 참여하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우리의 그릇됨으로 인하여 단지 우리의 생이 고달픈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3).” 기어이 우리로 주 앞에 세우시려고, 그 사랑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시려고. 나는 아버지의 짧은 간증 가운데 옛날, 그 아버지의 날들을 생각하며 그 심정을 헤아려보다 울컥하였다.

 

모두 돌아가기에 앞서 나는 아이엄마와 아이를 불러 나의 늙으신 아버지에게 축복의 기도를 부탁하였다. 부디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 주의 인자하심과 은총이 저들의 영혼에서 떠나지 않기를. 비록 오늘의 그 삶이 고단하여 서럽기만 한 것 같아도,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7-8).” 나는 아이가 호전되어 정상인으로 사는 기적적인 회복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주의 맡기심의 은밀한 비밀을 붙들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들어 일을 이뤄가시는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안다. 돌을 쳐서 샘물을 내시다니! 반석을 쳐서 봇물을 터뜨리시는 이가 하물며 오늘 우리의 슬픔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지 못하겠나? 나는 아이엄마에게 말을 더하지 않았다. 말씀에 담긴 주의 뜻과 ‘그 아이’가 주 앞에서 서약하고 믿음으로 사모하는 의식을 참여한 것이었으니. 해도 성령이 하실 것이다. 저이의 핍절한 마음을 주께서 아신다. 그 마음의 비밀을 살피신다. 그리 확신하였다.

 

오늘 내게 두시는 이 한 날의 증거가 그 어떤 증명보다 명쾌하였다. 그냥 죽고 싶을 정도로 서럽고 억울하였던 시절을, 그리하여 하나님 없이 살기로 하여 먼 길을 돌면서 한사코 외면하고 있던 동안에도, 나의 부모의 피눈물 나는 기도가 오늘에 나로 세우심을 받게 하신 거였다. 그 놀라운 비밀에 대하여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 수고와 애씀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이 오늘은 주의 것이다. 전적으로 주의 것이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9).”

 

결국 이 말씀을 어찌 이론으로만 설명할 수 있겠으며 지식으로만 알고 살 수 있겠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하나님이 이루신 이 놀라운 증거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3:13).” 이와 같은 말씀의 정교함 앞에 나는 두 손을 든다. 무릎을 꿇는다. 내게 더하신 이제 남은 날들이 온전히 주의 것이라. 부디 나의 남은 사는 날 동안에 다만 주의 증거가 되는 날들로 채워지기를.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 44:21).” 하는 오늘 말씀 앞에서 나는 더욱 구하고 바란다.

 

이로써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6).” 그러했던 고단함을 잘 안다. 그래봐야 소용없는 날들이었음을 또한 잘 안다. 어느새 이만큼의 나이가 되어 늙으신 부모의 날들을 돌아보며 비로소 알게 되는, 중늙은이가 되어서야 그 서러움이 변하여 주의 기쁨과 찬송이 되는 영광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묵묵히 말씀을 표준으로 준행하는 삶이어서 나의 남은 날들이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