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전봉석 2018. 11. 22. 07:12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창세기 10:1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시편 47:6

 

 

그럴 수 있지, 괜찮다, 다 그렇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서로 기분 상하지 않게 적당히 그 정도 거리에서 선을 지키며, ‘친절한 타인’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진 듯하다. 서로가 말하길, 설마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겠어? 하는 정도에서 잘 지내려고만 든다.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23:17).” 뭐라 하면 그것으로 서로의 관계는 끝장이 날 각오를 해야 한다. 애고 어른이고 내남없이 서로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각각의 옳음과 그름을 경계로 사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사람도 듣고 싶은 좋은 말만을 원하고 바랄 뿐이다. 정색을 하고 진정으로 뭐라 하려면 더는 안 볼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니 어느 때까지 그러려니 하고 말아야 하는지, 그래도 뭐라 해야 하는 게 맞는지, 나는 늘 그 경계에서 주저한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암 6:1).”

 

그렇듯 서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홍수 이후 그래서 사람들이 좀 나아졌는가?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창 10:1).” 우리의 여전함은 기어이 하나님을 사람으로 오사 사람으로 죽게 하는 값을 치러야 했다. 어쩌면 지금 이 시절을 살면서 슬퍼할 수 있는 게 복이고 능력이었다. 괜찮다, 아무렇지 않다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마치 유난을 떨 듯 다 그렇지 뭐, 하는 말 앞에 반박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나? 그렇게 또 누구는 지나가고 잊혀서 더는 상관없는 사이로 살다 가는 것.

 

나는 이러한 것에서 실망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울 수 있는 게 복이다. 묻히고 더뎌져 더는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로 괜찮다, 다 괜찮을 거야, 하는 따위의 말로 서로 위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이란 본향을 향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괜한 말을 해서! 나는 종일 그런 자괴감에 젖고 말았다. 아이가 언제 들어왔는지 카페에 올렸던 자신의 글을 싹 지웠다.

 

불쾌하다가 서운하다가 미안하다가, 아무튼 복잡한 마음으로 아침부터 가라앉아버렸다. 몰랐으면 모를까 정말 그렇게까지 하니까 싸가지가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혹시나 하고 바랐던 마음마저 정나미가 떨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면 다시는 잘하지 말아야지, 더 마음 쓰지 말아야지, 그러든가 말든가 내버려둬야지, 하는 마음이 각오처럼 나를 쥐고 흔드는 것이다. 속상하고 섭섭하다가도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나는 그저 또 후회가 화가 나는 것뿐인데.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들려지는 말씀이 마음을 붙드신다. 다시 또! 더 나은 방법이 아니라 했던 대로 다시! 지금 내게 두시는 아이가 있었으니, 아홉 시도 안 돼 아이가 왔다. 늘 찬양을 듣는 아이어서 헤드셋을 선물로 주었다. 평소처럼 일기를 쓰는데 똥을 지렸다.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에 갔다 와서 아이는 그리 행동하였다. 물티슈를 주고 다시 가서 깨끗하게 닦고 오게 하였다. 스물두 살 아이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싶었다.

 

그렇듯 그만두고 떠날 아이는 떠나는 것이고 남은 아이는 여전히 나의 어줍음으로 다시 또, 위하고 위로하고 마주하는 수밖에.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영어를 하고 수학을 풀고 같이 내려가 점심을 먹고 양치를 시키고. 그러는 동안 나는 눈치껏 아이를 살피고 덩달아 마음이 울렁거렸다가 안타까웠다가 속상하였다가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는 없어서. 더 나은 누군가가 되어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나에게 오늘 이처럼 맡기신 일이라,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기는 하겠으나.

 

이것이 문득, ‘외치는 자의 소리’로써의 삶이 아닐까?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황량하고 허허벌판인 것 같은 아이와 아이엄마와 또 늘 그 타령인 것 같은 우리의 생활과 아무것도 달라질 것 같지 않은 광야 같은, 싫증나는 일상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하시는 말씀 앞에 붙들린다.

 

공허한 메아리 같고 또 이런들 아무 것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은 날들이지만, 그래서 다시 기도하고 기도를 부탁하고 기도해주면서,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시 47:6).” 고로 이와 같은 바람이 또 의지가 주를 찬송하는 게 아닐까? 하나님이 아니시면 내가 누구를 돕기는커녕 나 하나도 온전히 건사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강가에 앉아 울어버리는 일.’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롬 15:30).” 바울은 그래서 기도를 부탁하고 있었던 것일까?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느라 본문으로 정하고 읽는데, 기도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음을 새삼 절실하게 느낄 따름이었다. 욕지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오고, 어디 얼마나 잘 되나 두고 보자,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는 말을 꼭 보고 싶다, 하는 심사로 뒤틀려서 몰래 글을 싹 지우고 정을 뗀 아이에게 싸가지가 없다고 욕을 해대고 싶은 때였다.

 

초딩 1학년 똥싸개 아이도 아니고 이건 스물둘 다 큰 청년 녀석이 똥을 지린 것 같다며 노랗게 질리는 걸 따라가 씻겨줄 수도 없고 물 티슈 한 통을 건네며 다시 가서 살펴보고 깨끗하게 씻고 오면 된다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이라니! 아무튼 뒤처리를 하고 돌아왔을 때 향수를 뿌려주자 해맑게 웃는 모습에서 슬퍼해야 하는지 기뻐해야 하는지 나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휘둘려 슬그머니 안정제를 한 알 삼켜야 하는 일이었다.

 

이러고 있는 게 대체 무슨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기나 하겠나 싶어져 마음이 울적해질 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5).” 말씀을 붙드는 데 있어 우리에게 서로의 기도는 절실한 것이었다! 나의 결연함이 또는 어떤 남다른 확신과 다짐이 이와 같은 난국을 거뜬히 이겨내고 극복하는 게 아니었다. 바울은 이를 알려주며,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거였다.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롬 15:31-32).” 기도를 바람은 몇 가지 일을 하기 위한 것인데, 첫째는 순종하지 않는 자들로 인하여 우리가 먼저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물밀듯 밀어닥치는 환멸에 빠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둘째는 우리가 하는 일을 같이 서로가 받을 수 있기 위해서이다. 마치 남 일 말하듯 멀찍이 서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정도의 친절함을 요구하는 게 아닌 것이다. 기도는 결코 거리두기가 아니다. 관여다. 참여다. 대신 지는 일이다.

 

셋째는 이와 같은 일을 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의 어떤 보람도 또는 그에 따른 가시적인 성과를 위한 기도가 아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다. 어떠하든 하나님의 뜻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 기쁨을 따라 끝까지 충성하기 위해서 서로는 기도해야 한다. 넷째는 그리하여 우리의 기도가 서로의 만남을 또는 격려와 위로가 힘이 되어 쉼을 얻고자 함이다. ‘이런 말’을 편히 할 수 있고 합심하여 주께 기도할 수 있는, 함께 하는 쉼이다.

 

결국 기도밖에는 답이 없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아니면 내가 어찌 저 영악하고 잔망스런 아이의 짓거리에 허허 하고 웃고 말 수 있겠나? 여태 신경 썼던 마음과 괜한 수고와 애씀이 억울해서라도 ‘어디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을 어찌 이겨낼 수 있겠나?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건 번번이 옥에 갇히는 일이다. 사면이 벽이라. 문이 없는데서 더듬어 찾는 문은 난감할 따름이다. 뭐라 한 것 하나로 나머지 아홉 개의 마음 쓰고 신경 써서 더 위하고 잘하였던 우리의 수고는 헛것이 되기 일쑤다. 그래서 억울함에 이를 악 물고 있을 때,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말씀은 그와 같이 감옥 같은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계신 것이다.

 

오늘 아침, 그토록 엄청난 홍수 심판 앞에서도 사람들은 결코 변하지 않고 또 이어지고 이어져 악하고 죄 됨을 어쩔 수 없이 이어지고 짊어지는 것에 대하여 환멸이 또 공허가 먼저 밀려올 따름이다. 아,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다. 죄인이 되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죄 그 자체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던 것이다! 도저히, 어떻게 해도, 아무리 어쩐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죄 됨을 대신하여 죄 그 자체로 죽으셔야 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기도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곧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고후 10:4).” 이내 승리하게 하시려고, 기도 말고는 우리가 바랄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말씀을 붙드는 것이고 말씀은 기도를 가르쳐 알게 하신다. 이는 오히려 환희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 47:1).” 주를 바라고 주만 바라는 게 기도였다. 우리가 올릴 찬송이었다.

 

그러므로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