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전봉석 2018. 11. 30. 07: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세기 18:17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하나님은 소리 높여 외치신다. 시장에서 성문 어귀에서 들리신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잠 1:20-21).” 하나님이 나에게 무얼 숨기시겠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들려지고 듣게 하시는 지혜가 일상에 있다.

 

그렇게 서로 비친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 일상에서 그 어느 것도 배제되는 게 없다. 아이가 또 그 사연이, 어디가 아프고 또 힘듦이, 어떤 사물이 또 계절의 변화에서도 하나님은 내게 숨기시는 게 없이 외치신다. 심지어 사람으로 우리 곁에 오신 이유였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풍성히 더 얻게 하시려고.

 

그저 늘 밋밋하고 같은 날이 되풀이 되는 것 같지만 그때마다 펼쳐지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다양하다. 어느 아이엄마가 새로 문의를 하였고 실은 그 애가 가장 어려워하던 아이를 좇아 교회에 왔던 아이였고, 누군 기껏 공들여 마음을 다했는데 마치 증발해버린 것처럼 더는 상관도 않고, 잘한다고 더 잘한 경우에 더 큰 오해와 실망이 생겨나고, 하는.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시 55:13).”

 

그러니 이제 좀 알겠다싶으면 어림없고, 이건가싶어서 그리 마음을 두면 어그러지기 일쑤고. 이게 그러니까 나만 그런 건지 목회란 그런 것인지. 나의 동료 나의 친구를 찾았다가는 어김없는 일이어서. 그 애가 당신을 은근히 좋아해. 아빠에 대한 실망과 원망이 가득한 아이여서 여기 와서 가끔씩 자기 이야기를 하곤 해. 넌지시 귀띔을 하는 아내의 말에 어떤 한숨이 또 달갑지 않은 마음이 먼저 일었다. 솔직히 어려워서, 마음이 그다지 내키지 않아서 그냥 잘해준 것뿐인데. 나의 이런 어그러진 마음까지도 하나님은 건드신다.

 

그러니 구하는 수밖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그래서 저 아이를 ‘훈련’시켜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었으니.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여기서 가르친다는 것은 훈련시킨다는 의미로 ‘어머니의 젖을 물리기 전에 아이의 잇몸을 문지르고 기름을 바른다.’는 의미가 있단다.

 

마땅히 행할 길에 대하여 가르쳐야 하는 것으로 이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게 아니다. 이는 뒷받침하는 잠언은 많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13:24).” 곧 우리에겐 근실함이 필요하였다. 목요일은 연이어 초딩 중딩 아이들이 수업을 온다. 모처럼 왁자하니 활기찬 날인데 그래서 피곤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잠언의 힘이다. 이제는 그 날짜에 맞는 한 장을 펼쳐 서로 합독을 하고 그 가운데 한 구절을 정한다.

 

애들이 뭘 아나, 싶은데 그런 아이들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한 녀석은 어렵다! 하고 하기 싫은 마음을 드러내면 한 장의 잠언을 그냥 그대로 필사를 한다. 내가 모르는 척 하였더니 다른 녀석들도 서로 모르는 척을 한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렇게 제일 못하는 아이 같은데 제일 변화가 빨랐다. 이제는 꼭꼭 먹을 걸 나눠 먹고 심지어 선생에게 먼저 양보할 줄도 안다. 언제는 생일이라며 끝나고 아이들과 떡볶이 집으로 갔다. 엄마가 준 돈을 그때까지 안 끄고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뭐라 내가 이르는 것보다 나는 다만 아이의 잇몸을 문지르고 기름을 바르는 사람일뿐이란 생각을 하였다. 공부도 못하고 늘 시큰둥하여 서로의 시비거리가 되던 아이였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엡 4:21).” 그저 저 아이는 한심하다 싶을 정도로 잠언을 필사하여 800자를 채울 뿐이었다. 진리는 요란하지 않다. 강압적이지 않고 비인격적이지 않다. 하기 싫은데 하기 싫어서 옮겨 적을 뿐인 성경이었다.

 

저녁 늦게 아내가 누구와 통화를 하다 화들짝 놀라며 그 애가 그 애였구나, 하고 달려와서 말해준 것이 저 아이 때문인 거였다. 애가 달라졌다. 그런 모습에 이웃하고 있는 아이엄마가 그 애를 보고 자기 아이 때문에 연락을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배운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 풍채도 없고 모양도 없이 흠모할만한 게 없던 데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그 시간에도 아이 안의 변화는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처음 그 애가 왔을 때 아내는 도로 안 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했었다. 글방에 처음 온 날, 정말이지 가관이라. 말도 안 듣고 시무룩하니 혼자 삐진 아이처럼 뚱하니, 다른 녀석들도 그러려니 하고 상관을 하지 말라는데. 아마 한동안은 글도 안 쓰고 책도 안 읽고 뭐라 하면 듣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니 그 돈을 안 쓰고 여태 갖고 있었어? 여기 친구들이랑 같이 사먹으려고? 나는 놀라서 아이에게 물었다. 어제는 아이 생일이라, 나는 숨겨두었던 초코파이를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종종 무시하고 거들떠도 안 보는 아이들인데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그처럼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리 달라진 것이다. 내가 안달을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저 친밀하고 자상하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일. 쓰기 싫어서 억지로라도 잠언을 그냥 베껴 써온 걸 보고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일.

 

그리스도를 배워서 사는 일이란 별 볼일 없고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그것으로 다하는 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래서 필연적으로 공적인 삶을 사는 게 되는 것이구나, 생각하였다. 우리는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참고 또 인내하는 사람들이다. 하다못해 아이도 하기 싫어 죽겠는데, 그래서라도 잠언을 필사하여 800자를 채웠다. 나는 다만 아이의 잇몸을 문질러 기름을 발랐을 뿐이다. 그런데 보니 아이는 젖을 물고 힘껏 빨아대고 있었다.

 

우리의 일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우리 안에 사모함이 생겨난다. 고작 10여 분 탁구를 치러 오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생일이라며 2만원을 준 것을 며칠째 들고 다니다가 ‘글방 아이들’과 같이 가서 떡볶이를 먹으려고 참은 것이다. 같이 못 가는 내겐 미안했던지 오백 원 천 원 하는 불량식품을 슬그머니 내 책상 위에 놓고 가는 것으로, 아이가 그렇게 달라지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한 게 아니어서 멋쩍었다. 아이엄마의 반응이 이웃하고 있는 엄마에게 전달되고 그 집 아이도 그 모양이라서 혹시 받아줄 수 있겠냐며 문의를 하는 것이었으니.

 

우리는 다른 여느 교훈에 흔들리지 않는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3:9).” 아기가 엄마 젖을 사모할 때 그 잇몸을 문지르며 단련시키는 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처럼 누구에게 어떤 공적인 삶이 되어주는 일이었다. 그리스도를 배우라.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이는 자라가게 하심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 자란다는 건 날마다 소란스러운 게 아니다. 요란하지 않다. 오히려 덤덤하여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밍밍하다. 그저 밋밋해서 이 맛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런 아이’를 계속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싶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쓸 게 없으면 잠언을 그대로 옮겨 적기라도 하게 하였더니, 오히려 잘한다는 아이들보다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었다.

 

우리는 그 젖을 사모하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말씀이 이처럼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 앞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하시는 데 신난다. 주께서 이루시고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을 과연 우리에게 숨기시겠나? 그 말씀이 일상에서 소리친다. 외친다. 들려주시는 것이다.

 

때론 저 지긋지긋한 아이와 아이엄마들의 등살에서, 문득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아이에게서, 또는 대놓고 ‘쌩 까며’ 날아가 버린 아이에게서도 지혜는 외친다. 나를 불러 세운다.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 쩔쩔매는 몸뚱이도, 싱겁게만 느껴지는 무료한 시간들도 거듭하여 말을 거는 것이다. ‘내가 하려는 것을 네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이 드러내어 보이시는 일이었다. 그 지혜는, 성령은, 본래부터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잠 8:22).” 여전히 모든 데서 외치신다.

 

오후께 뜬금없이 아버지가 산책을 하다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며 가족들 카톡방에 올린 성경구절에서도,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그리하면 주실 것이라는데,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11:26-27).” 그렇듯 날마다 매순간 모든 사물이 또 사람이, 시공간의 모든 것으로 지혜는 부르고 있었다. 이를 듣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이다.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 길로 인도하시려고,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3).” 일일이 알리시는 주의 일에 대하여, 때론 감격하고 때론 힘에 부쳐 징징거리면서도 무던할 수 있도록, 말씀은 말씀으로 나를 불러 세워 요동하지 않게 하심이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