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세기 19:39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56:3
‘그 땅’의 문화에 젖어 산다는 것은 롯의 가족을 통해 얼마나 철저하게 죄악 된지 보여주는 말씀이다. 주의 사자가 저들을 구하고자 왔다. 이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다. 그 마을에 소요가 일자 이를 처리하기 위해 롯의 수단은 저열하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창 19:8).”
여러 해석이 분분하지만 아무리 집에 들인 저들을 성적으로 유린하려 들었다 해도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자신의 두 딸을 내어주려 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이는 얼마나 저들 풍속이 문란하고 안이했는지, 그 두 사위들의 반응에서도 드러난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4).”
간신이 저들만 이끌려 멸망을 피하였을까 싶을 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26).” 이 얼마나 허망하고 두려운 일인지, 예수님도 이와 같은 사실을 언급하시며 “롯의 처를 기억하라" 하시고,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2, 33).” 그처럼 급작스럽고 다급한 멸망의 때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4-35).”
그처럼 구원을 얻은 뒤에 저들의 행태를 보자.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창 19:32).” 술과 섹스로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려고 드는 것이 오늘 우리가 젖어 사는 ‘이 땅’의 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떤 답답함이 묵지근하게 가슴을 누르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어울려 산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생각한다. 어느 순간에 몸에 배고 마음에 젖어 저도 모르는 새에 그처럼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주장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심은 저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다시 말하면 우리를 일찍 죽여서라도 우리를 살리시려는 것이다. 롯의 경우를 보면 저가 구원받은 게 어처구니없을 정도이다. 베드로가 이를 의인이라 하지 않았으면 그 이해는 더 오리무중이 될 거였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전 2:7).”
그렇다고 하면, 저만 간신히 구원에 이른 것도 두려운 일이다. 이웃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저의 사위가 될 이들에게도 심지어 아내와 두 딸들에게도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산 신앙이 얼마나 초라한지.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 19:29).”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움이 먼저 이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 나는 과연 롯보다는 나은 삶인가? 주저하며 주 앞에서 송구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주를 의지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다가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는데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고 오늘에 세우신 것이었으니 은혜 중에 은혜일밖에.
아이는 글을 쓰고 나는 설교 원고를 다듬었다. 산수를 하고 영어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원고를 썼다. 그래봤더니 아이는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다 금세 싫증을 내고 자꾸 다른 것을 했다. 일찍 내려가 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아이가 가고 나는 잠깐 잠이 들었다. 일어나 앉아 설교 원고를 마저 정리하는데 아이와 같이 할 블록과 문구류를 들고 아이이모가 왔다. 커피만 한 잔 내려들고 서둘러 돌아갔다. 늘 보면 쫓기듯 사는 것이 안 됐다. 쓸 만한 문구를 정리하고 설교 원고를 출력하여 다시 읽었다. 한 주가 금세 흘러갔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며 그런 생각을 하였다.
어느새 노인이다. 곧 주 앞에 서서 인생이 고작 이슬 같았다고 말하겠지? 돌아보면 한 뼘도 안 되는 세월을 두고 헐레벌떡 사는 저들 모습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그 안에 내재된 속성은 탐심이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예수님은 이를 경계하셨다. 그 위로가 무슨 공연을 관람한 것이다. 어디 경치 좋은 곳의 비경을 감상하는 데 의를 둔다. 이상을 현실로 좁혔다고 위안을 얻는다.
탐심은 탐욕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마음이다. 가진 것으로 만족함이 없다. 더 배우고 더 누리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게 삶의 가치와 보람이라 여긴다. 이는 근본적으로 시기심에 기인한다.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이다. 저들처럼 살고자 한다. 롯의 일가가 보인 행태도 그러해서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일처리를 한다. 두 딸을 내어주려 한 아비나 아비와 동침하여 후손을 보려한 두 딸이나. 이를 성경은 자기 배를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명명하였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8).” 한데 저들은 알지 못한다. 그것이 얼마나 교활한 것인지 또는 아첨하는 말인지, 왜 저들은 순진한 자들을 미혹하는 것인지. 다만 자기들의 열심으로 족하게 여기는 터라, 그 배는 온갖 남의 말로 가득하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그것이 무의식을 지배하고 우리의 감정을 좌우하며 자신을 저들처럼, 그 땅의 문화에 젖어 함께 사는 데 무리가 없게끔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간곡한 어조로 명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떠나라. 두 말할 거 없다. 저들은 배운 교훈을 거슬러 산다. 그 교훈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다(엡 4:1).
부르심을 받은 자로 합당한 삶이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2-3).”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하는 삶이었다. 이는 겸손이었고 온유였고 오래 참음과 사랑이었다. 이로써 서로를 용납하고 평안의 줄로 하나 되는 것이다. 곧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 우리를 부르신 이 부르심은 하나였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본문을 삼고 그와 관련된 성구를 찾아 묵상한다. 이를 이어가며 주께서 주시는 생각을 원고로 작성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처럼 이어져서 나의 하루하루를 채우는 것이다. 내게 가장 귀한 은총은 이와 같이 말씀으로 말씀에 이끌리어 사는 게 아니겠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겅중거리듯 살아가는 세월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살게 하는지! 때로는 그 수고가 두려울 따름이다.
아이와 이뤄가는 시간이 비록 동문서답을 하며 전혀 달라질 게 없는 헛수고에 불과한 것이라 해도. 주일 날 누가 온다고 설교 원고를 아홉 장씩이나 작성하여 뭐하나싶다가도. 또 이처럼 아침에 말씀 앞에 앉아 푸념처럼 나의 날들을 풀어가고 돌아보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저 맹랑할 따름이라 해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4).” 그저, 하나님이면 족하였다.
아이가 기도할 때, 또 무슨 말로 자기 이야기를 이어갈 때, 나는 저의 속을 알 수 없다. 무슨 말인지 분간하지 못해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저도 어쩔 수 없는 무논리여서 나름의 가치와 생각을 말하고 기도하는 것일 텐데. 오직 주만이 아시는 일일 거여서 나는 때로 장황하게 이어지는 아이의 기도 중에 눈을 뜨고 아이를 바라본다. 그저 늘 바삐 움직이며 일에 치이고 사는 데 정신이 없는 누구를 만날 때면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주를 의지한다.
나의 이 궁색한 논리로밖에, 내가 주를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 나는 다만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3).” 전혀 롯보다 나을 게 없는 사람이라,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9).” 아이의 장황한 기도 가운데서 주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여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10).” 곧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11).”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