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세기 21:6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편 58:11
우리의 웃음은 공식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행하면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때론 그 말씀이 어렵기만한데,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겔 2:8).” 곧 ‘입을 벌리고, 먹으라.’ 하실 때의 난감함.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9).” 우리는 결국 말씀 붙들고 말씀으로 사는 것이었다. 부르심이란 ‘말씀으로’인 것이지, 저기 어디 미지의 세계로가 아니었다. 이를 우린 삶 가운데 발견할 수 있다. 보물찾기 같이 꼭꼭 숨겨두신 게 아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로 들려지는 것이다. 지혜가 부른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잠 1:20).”
습관처럼 아이가 네? 이거요? 이렇게요? 정말요? 하면서 다그치듯 되묻는 것은 실은 몰라서가 아니라 그 안에 하기 싫은 마음이 있어서이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 3:1-3).”
입에는 단데 배에는 쓴 것, 삶으로 이겨 살려니까 죽을 맛이라. 그런데 오늘 말씀은 난센스 같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창 21:1).”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신다. 결국은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들이라.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성전에서 주를 사모함이란 그런 것이었다.
예배 후에 동기 전도사 가족이 왔다. 나는 저들이 부러웠다. 뭘 해도 될 나이였다. 저들이 고민하고 힘들어하며 그것으로 주를 의지하며 씨름하는 모습이 귀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튕겨져 나갔었고, 외면하였고, 부인하였고, 네? 이거요? 정말로요? 하고 자꾸 되물으며 지연시켰었다. 그렇게 흘러간 나의 시간들이었다. 우리가 이제 붙들고 늘어지는 그 말씀의 진귀함에 대하여, 요즘 내가 붙들려 있는 말씀을 들어 말해주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움킨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으르렁거리며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가 필요한 때였다.
우리가 배운 이 교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2-4).” 곧 우리가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목적이었다. 더 나은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라는 게 아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일상에서였다. 막연한 뜬구름이 아니라 실제의 실재였다.
어쩌면 나는 그 시절을 그렇게 떠나보낸 것에 대하여 그 아쉬움을 회환을 저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겁하게 나는 피하였고, 좋아하는 세상을 곁에 두기를 원했으며, 하나님을 좀 더 나중에 알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오늘을 두고 보면 이 모든 게 은혜라. 어느 것도 주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었으니, 지금 저들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이 오히려 바른 길로 가게 하시는 외통수, 막다른 길이었으면 하고 바라였다. 여지를 두면 어김없이 차고 들어오는 게 불순종의 마음이었으니까.
이게 맞나? 이 길이 옳은가? 하고 되묻는 이 씨름은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평생을 다하는 동안에도 계속 될 거였다. 사라의 웃음은 어이없어서였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여태 기다려온 자신들의 오랜 기다림에 대한 허허로움의 것이었다. 이를 변하여 실제 웃음으로 화답하시는 하나님이셨으니, 그 사이 저들의 우여곡절은 이내 근심거리로 남기도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창 21:11).” 그런 거 보면 우리의 근심은 항상 자신이 벌여놓은 일 때문이다. 측은지심으로 함께 데리고 나왔던 조카 롯으로 인한 근심이나, 이내 사라의 말을 따라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로 인한 근심이나, 이내 안 그래도 됐을 것을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묵인과 타협으로 벌인 결과였다. 그럼에도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6).”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신다.
나는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아직 한참 때, 무얼 해도 가능할 것 같은 서른 즈음에, 나는 저들의 무모함까지도 부러웠다. 나의 부친은 그 나이 때 난데없이 말씀 앞에 승복하고 붙들려 전투적으로 벌여왔던 그 사역의 길에 대하여. 물론 자식으로서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과 괴로움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와 같은 ‘무모함’이 오늘에 이르러 우리로 웃게 하시는 것이다. 사남매 모두 주의 사역에 부르심을 받고 맡은 바 그 사명을 다하는 축복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으니.
어쩌면 믿음의 표면은 무모함이고 배면은 전투적인 게 아닐까? 부디 그 다툼에서 이기기를. 승리하여 한 발이라도 헛되이 내디딤이 없이 주의 길에 서기를. 결국 사라의 웃음은 승복이었다. 경수가 끊기로 늙은 태에 주의 약속을 받아 새 생명을 잉태하고 저를 낳음으로 말씀에 동참하는 순간이었다. 반드시 ‘그 때에’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 58:11).”
우리가 의를 행함은 저 무모함을 받음이다. 믿음으로 서는 것이다. 이를 가지고 삶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고단함과 어쩔 수 없음을 일거에 맡기는 일이다. ‘주께서 알아서 하시라.’ 어쩌면 나의 부모의 짧은 외마디 고백을 꼽으라면 그게 아니었을까?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여기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시면, 또한 가게 하실 이도, 그에 따른 이 모든 우여곡절도 주가 맡아주실 것임을. 그리하여 ‘죽으면 죽으라.’ 하는 고백으로.
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말씀을 가져다 먹으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는 말씀이다. 입에는 단데 배에서는 쓰다. 말로는 쉬운데 삶으로는 어렵다. 남에게 들려주기는 용이한데 자신이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리 말씀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여기까지가 한 마장이라. 주저하고 또 되묻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그게 고역이라.
한데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삼켰더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하는 말씀의 길이 나의 삶에는 있었다. 나의 부모가 그러하였고, 나의 형제들이 그러했으며, 나의 오늘이 또한 그러하여서, 내가 저들의 젊음을 끔찍이도 사랑하고 눈이 부시게 부러워하는 것은 일찍이 이를 먼저 알았더라면 얼마나 더 귀하게 주의 영광을 누리었을까? 하는 것이다. 특별히 주의 사역에 부르실 땐 남다른 동요와 고충과 체험이 따르기도 한다. 뒤지게 맞거나, 하염없이 길어지거나.
아, 그래서 그 평형수로 우리에게 각각의 십자가를 채우셨다. 배가 물 위에 있을 때는 그 무게가 오히려 균형을 잡게 하는데, 이를 이고 산으로 오르려니 죽을 맛이라.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8-39).” 돌아보면 내게 두시는 십자가가 오늘의 나로 하여금 주만 바라게 하는 것이었다. 그 거친 창파에도 균형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는 어느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대신 지는 게 되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내게 여전히 불안증을 두시고, 육신의 연약함을 제하지 않으심으로 오늘 내게 두시는 ‘저 아이’, ‘저 한 영혼’을 주의 이름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나의 가난이 또 모자람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구실을 하는 거였다.
곧 내가 받는 이 괴로움이 기쁨이라고 하는 사도의 증언은 결코 그럴듯한 자기변호가 아니다. 실제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질 수 있는 것이다. 한 영혼을 그야말로 천하보다 귀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나의 육체에 채우는 일이다. 분명히 엄청난 부담이고,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이고 질 수 없는 괴로움의 무게지만, 성령의 물결 위에서 오히려 나의 콤플렉스는 또 실제의 고통은 평형수가 된다. 균형을 잃지 않게 한다.
오늘 우리에게 부여하신 ‘자기 십자가’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뒤늦은 부르심이, 줄줄이 달린 자식들과 가난이 오히려 아버지를 주 앞에 온전히 세울 수 있었던 평형수였다. 큰 배에는, 더 먼 항해를 위해서는 그 평형수의 양도 엄청난 것이었다. 많이 힘들고 부담스럽다면 그만큼 더 큰 배로 구축하시는 거였다. 부디 나의 사랑하는 동기 내외의 사역이 그리하여 저들의 웃음이 될 것을 확신한다. 저들의 웃음이 저들로 인해 모두의 웃음이 될 것을 말이다.
이와 같이 서로 문안함으로 서로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큰 의지가 되는 것을, 나는 어제 전한 설교 말씀 후에 실제 그 의미가 우리의 소소한 삶 가운데서 구현되는 것을 보았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그리하여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