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전봉석 2018. 12. 6. 07:07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창세기 24:6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시편 61:7

 

 

올 수는 있으나 돌아갈 수는 없는, 다시는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사람들. 문득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누군가 설교 중에 그리 표현한 게 생각난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지내면 지낼수록 알겠다. 내가 임의로 오거나 가거나 할 수 있는 구분이 아니었다. 때론 환상에 젖기도 한다. 낭만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많은 착각과 환상에 젖어 있는가를, 오늘 말씀은 알려준다.

 

하나님과 단절된 모든 것은 틀렸다. 서로가 다른 게 아니라 한 쪽은 맞고 한쪽은 틀렸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지 어떤 여지를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의 종교와 경건의 실상에는 얼마나 많은 찌꺼기가 섞여 있는지 모른다. 아이가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물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환상을 보고 어떤 기적을 행하는 식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덧붙여 물었다.

 

더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말씀이 주어진 시대다. 성경이 없던 때 하나님은 음성과 환상으로, 자연의 기이함과 동물들의 기괴함으로도 말씀하셨다. 여전히 그와 같은 것을 바란다면 이는 말씀에 대한 건조한 마음 때문이겠다. 아이가 아침이면 일어나 앉아 성경을 필사하는 일, 서둘러 글방으로 올라와 이와 같이 말씀을 나누는 일, 어떤 어려움 앞에서 또는 기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이와 같은 게 영적인 삶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자꾸 부추겨 성령을 운운하고 어떤 기상천외한 일을 끌어다 붙여 뭔가 다른 걸 보여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들에게 신앙이란 마술봉 같은 거여서 불가사의한 일을 도모하고 이를 ‘영적인 삶’으로 둔갑시키려는 사기꾼 같은 기질이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일찍이 하나님이 우리 일상 가운데 얼마나 소소하고 세밀하게 개입하고 계시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는 기도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주께 의뢰하였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창 24:12).” 그리고 진지하게 주목하였다.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21).”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주도하셨고 일이 되어지려니까 그리 평탄하게 인도하셨다. 보면 늘 그런 것 같다. 무리하고 억지스럽지 않다. 푸닥거리하듯 일을 맡거나 수행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에겐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26).” 이와 같은 자세와 마음이면 족한 것이다. 우리 삶에는 찬송이 있다. 누구 눈엔 우연으로 비쳐질 일이겠으나, 이제 이쪽에 서 있는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27).”

 

온갖 것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시대에 살면서,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막 13:21).” 나는 아이에게 이 대목을 설명하고 싶었고, 이를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말씀뿐인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22).” 자꾸 부추겨 들쑤시고 다니는 이들에게 유혹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미 우리에게는 말씀하셨다. 곁에 둔 말씀보다 멀리서 들리는 말들에 끌리는 시대다.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23).” 종종 느끼는 일이지만, 아이의 질문에 나의 대답은 사뭇 진지하여서, 다시 이어지는 엉뚱한 질문에 도통 아이가 알아듣기는 하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러다 불현듯 드는 생각이 이는 아이에게 대답을 주기 위한 말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말씀인 것을 깨닫는다. ‘영적인 삶’이란, 일상에서 묵상하다 주의 일을 보는 것이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창 24:63).” 우레가 치고 천둥 번개를 동반한 어떤 기이한 현상이 아니다. 늘 넌더리나는 일상에서 또 그 식상한 일의 반복 가운데서 무던히 주를 바라며 주의 뜻을 묵상하는 자리에서 주가 하시는 일을 마주하는 것. 고로 그분 앞에서 즐거워하는 일.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잠 8:30-31).” 내게 두시는 한 날 한 날의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는 일.’

 

다 늦어서 아이가 문자를 하였다. 직업훈련비로 돈이 얼마 들어온 것이다. 그걸로 안경을 새로 한다는 소릴 여러 번 했었는데, 안달이 났다. 그 마음을 잘 안다. 여덟 시가 다 되어서 왔다. 아이를 데리고 안경점으로 갔다. 전 주에 미리 귀띔을 해둔 단골이라 저는 자연스럽게 아이를 대해주었다. 시력 검사를 하고 테를 고르는데 10만원 안짝으로 해야 하는데 녀석이 자꾸 분수에 넘치는 쪽을 기웃거리며 좋은 테를 고른다. 젊은 사장은 그냥 두시라 하면서 아이가 써보고 싶다는 걸 일일이 꺼내준다. 나는 조금 민망하여 아이를 제지하려는데 저는 그냥 두라는 것이다.

 

제가 준비하신 금액에 맞춰서 해드릴게요. 나는 저의 태도와 말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느꼈다. 결국 배 이상의 것을 고른 것을 십만 원에 렌즈까지 새로 해서 아이를 돌려보냈다. 나는 이처럼 일련의 사소한 일상에서 ‘영적인 삶’의 느낀다.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몸소 체험한다. 아이엄마는 아이의 그런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일에 못 마땅해서 나의 길 설명의 카톡에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 속을 어찌 모를까.

 

고로 우리의 영적인 삶이란,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창 24:6).” 어떤 단호함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다. 결코 우린 서로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다. 내가 맞는다면 저는 틀린다. 저가 맞는다면 내가 틀리다. 모호함이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시대에 두루두루 좋은 게 좋은 신앙이 되었다. 그러나 ‘너의 옷은 희게 하라.’ 성경의 단호함은 여지가 없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시작하신 이가 끝까지 이루실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5).” 다만 ‘복음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8).” 고작 그 의미도 다 모르고 묻는 아이의 질문과 다 저녁에 돈을 들고 급히 안경을 하고 싶어서 찾아온 아이에게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증인이 되는 것뿐이다. 물론 안면이 있기는 했으나 젊은 사장이 그와 같이 아이를 이해하고 대할 줄이야!

 

되어지는 모든 일이 때론 요상할 정도로 순탄하였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9-11).” 사도의 기도가 어떤 의미인지 새삼스럽다.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일상의 모든 것들이 영적인 일이며 신령한 은사이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다.

 

때론 번거롭고 속상하고 소용도 없을 것 같은 일 중에서,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욥 38:1).” 그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4).”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신 것을.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7).” 내 안에 두시는 기쁨이 또는 확신이 더욱 주만 바라게 하는 것이다.

 

아이엄마의 마음 상한 단답형의 짧은 대답으로 마음이 어려운 걸 아내가 눈치 채고, 그럴 수 있어! 나 같아도 속이 터질 거야!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이니! 하며 혼자 되뇌는 아내의 말이 나로 하여금 그이의 마음도 헤아려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것이다. 마음에 걸려서였을까? 꿈에 아이엄마가 아이를 건사하며 피곤에 찌든 몰골로 아이 곁에 쓰러져 잠드는 것을 보았다. 마음이 안쓰러워서 다시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 46:4).” 부디 저이의 마음에도 내가 듣고 보는 것이 보여지고 들려지기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주의 말씀이 저의 위로가 되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이 어느 것도 영적인 삶이 아닌 게 없고, 성령의 임재와 내주가 매순간에 깃들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곧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시 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