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전봉석 2018. 12. 7. 06:59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세기 25:22-23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시편 62:9, 11

 

 

 

이 한 장의 말씀에 숱한 사람들과 방백과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때론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이처럼 허다한 이야기들이 마치 끝 모를 우주의 광활한 질서와 같이 이어지고 어긋나고 비껴가고 스며들어 한 이야기,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와서 이번 주말에 작은 아버지가 운명할 것이고, 초상을 치러야 해서 다음 주 월요일에 오려고 했던 일을 앞당겨 왔다는데, 그동안 의존하였던 연명장치를 떼기로 했다는 거였다.

 

점심께 졸다 일어나 맞이한 소리라 의아했던 것이 이 한 장의 말씀 가운데서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2-23).” 한데 어지러이 정신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모든 게 순리 안에 있었다.

 

나는 저의 말에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가 그 심오함 앞에 숙연하여진다. 한 생이 가고 또 한 생이 와서 새로이 이어지다 그 생을 다하는 동안의 이런저런 사연들이 고작 한 장의 서술과 나열에 불과한 것을.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오늘 아침 시인의 표현이 적절하였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 62:9, 11).” 이 모든 일이 주의 권능 안에 있다. 그럴 때 우리의 자세는 무엇일까?

 

이를 어찌할꼬? 하고 주께 아뢰고 고하는 일.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12).” 누구로 왔다 어찌 살고 어떻게 갔든, 인생은 그저 입김 같이 가벼워서 홀연히 사라지고 마는 것인데,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고는 무엇을 말하고 논할 수 있을까? 그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1).” 주어진 일상과 그 이어지는 날들과 계절이 속절없어 아득하였다.

 

김치찌개를 너무 많이 해서 문득 딸네 집에 가져다주고 싶어서 장모는 노구를 이끌고 실버카에 찌개 그릇을 싣고 인천에 왔다. 채 삼십 여 분도 못 있고 다시 서울로 가야 하는 길이어서 간신히 붙들고 국수 한 그릇을 저녁으로 대접하고 보내드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인생이라니! 틀니가 부러져 오물거리듯 국수를 씹어 삼키는 장모의 주름진 얼굴이 한 생의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였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2).” 무엇을 붙들고 살다 갈 것인가! 그의 곁에서 날마다 그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어 산다는 게 즐거움이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 8:30).” 그럴 수 있는 게 내게 더하신 은혜라. 성령이시다. 주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들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마음이 헛헛해서였는지 아내는 그냥 집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였고, 딸애가 준 어디 커피 쿠폰을 가지고 가서 조각 케이크와 함께 잠깐 찬 공기를 쐬고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어릴 적 자신의 사진과 우리 결혼식 때 사진을 보여주며 혼자 뭐라 궁싯거리는데 그 속을 어찌 모를까?

 

우리로 진리의 영이 함께 하시는 남은 생을 살게 하시는 게 복이었다. 그럴 때가 있었지? 이랬을 때가 있었어? 하고 놀라는 아내의 회한어린 말들이 오늘을 더욱 감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사모하며 자라가게 하신 일들이 놀라웠다. 전에 같으면 그랬었지? 하고 덩달아 어떤 그리움에 젖어들거나 그리하여 생을 아쉬워하며 바동거렸을 텐데, 이 모든 게 주의 권능 아래 있다는 사실 앞에 이처럼 안도할 수 있다는 것.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우리가 이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음으로 더는 예전 같이 살 수 없다는 데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아무리 복잡하고 서로 한데 엉겨 뒤죽박죽인 것 같은 인생들이지만,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살다 이내 하나님의 이야기로 서술되는 것이었으니.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창 25:2-4).” 이어지고 더해져 하나님의 세계는 숱한 이야기들이 서로 한데 어우러져 광활한 우주보다 더 오묘하게 흐르고 또 멈추면서, 이내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7).”

 

온갖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고 서로가 서로를 대적하면서 역사는 이루어져 오늘에까지 이르러 나의 이야기도 보태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그저 그런 인생으로 족한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자랄지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성경은 이 모든 장구한 찰나 앞에서 우리의 사명을 일깨우신다. 오직 주의 사랑 안에서 범사에 그리스도의 정성하신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게 그저 흩어지고 말 이야기가 아니라 영원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으로 오늘을 산다. 모두의 이야기는 항상 오늘에서야 들려지는 것이어서, 영원토록 동일하신 이 앞에서 우리는 그저 잠잠할 따름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다른 데 기웃거려봐야, 여기저기 눈길을 줘봐야, 그 모든 것 또한 입김의 무게만도 못한 것들이어서!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6).” 더는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찬양을 흥얼거리듯 허밍으로 따라하며 하루하루 나의 생을 되뇐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