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창세기 27:35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시편 64:9
우리 이해와 상식으로 옳고 그름을 논할 때, 오늘 본문의 말씀보다 아이러니한 사건은 없을 것 같다.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몰상식은 몰염치를 가져왔다. 이삭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자식을 축복하려 하였으면 어땠을까? 그런데 어딘가 어그러진 요구를 듣는 것 같다.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 27:3-4).”
나를 위하여, 내가 즐기는, 내게로 가져와서, 내가 마음껏, 하는 자기위주의 발상이 우선은 어리둥절하게 한다. 축복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는 또 둘째 아들 야곱을 편애하는 모친의 발상과도 같다.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8, 10, 13).”
편애란, 어느 한쪽 한 사람만 유달리 사랑하는 것이다. 유달리는 다른 경우와 비교하면 두드러지는 정도의 부사다. 이와 같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야곱에게로 흘러가지 못했을까? 결국 형제가 반목하고 민족이 나뉘어 서로 겨누는 까닭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야곱이 죽그릇으로 장자권을 사지 않았으면 축복권을 얻지 못했을까? 우리의 어그러진 사랑까지도 하나님은 이를 들어 선으로 사용하신다.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창 27:35).”
우리의 결말은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한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시 64:9).” 일련의 상황과 사건을 두고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심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긍휼하심을 덧입는 것이다. 축복은 온전히 주의 것이다. 이를 누구도 좌지우지할 수 없다. 임의로 덧대거나 자기 의를 구하는 데 사용하려 한다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소용되게 하신다. 문득 예수님의 첫 설교를 산 위에서 들어보자. 팔복이 전해졌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 증거가 축복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빼앗았다. 우리의 윤리나 도덕적인 잣대가 그 기준이 되지 못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 축복을 소홀히 여기는 자는 그의 것을 빼앗긴다.
우리가 빼앗는 축복의 투쟁 방식을 여덟 가지로 알려주셨다(마 5:3-10). 각각의 방식은 간결한 문장으로 정돈되었고 그 서술부분은 ‘복’으로 규정되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로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각각의 복은 하나인데 ‘임마누엘’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아무리 더 나은 게 있다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 마음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현실에서 우리는 늘 애통해할 수밖에 없다. 그저 온유함으로 주를 바란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이다. 누구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다. 마음의 청결을 위해 애쓴다. 서로에게 평화를 구한다. 의를 구함으로 외면과 멸시와 박해를 당한다. 각각 여덟 가지의 마음인 것 같은데 이는 결국 하나이다. ‘임마누엘’을 맛보아 알고 이를 사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리는 복은 빼앗은 하나님의 나라다. 저의 위로가 있다. 어디에 어떤 상황으로 놓이든 그 땅이 천국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는 늘 배부르다. 만족함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길 줄 안다. 저들의 딱한 사정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왜냐하면 저들과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별 볼일 없이 사는 것 같지만 날마다 천국이 저들 것임을 박해하는 자들도 보고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몹시 추웠던 토요일, 아내와 점심으로 꽁보리밥을 먹고 <국가부도의 날> 영화를 보았다. 우리가 그 모진 시간을 견뎌왔던 것을 생각하였다. 천천히 걸어서 먼 길을 돌아왔다. 한 아이엄마가 전화를 하였다. 같이 어울리는 여자와 두 딸이 같은 나이라. 서로 비교되어 저의 능멸이 모진가보다. 아내는 한 시간 가깝게 저의 말을 들어주고 위로하였다. 이런저런 여건은 다를 게 없는데 우리가 사는 땅은 저들의 땅과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여덟 개의 복을 전개하신 후 개별적인 것, ‘너의 복’에 대하여 긴 시간을 설교하셨다(마 5:13-7:27). 우리 일상은 같은데 그것을 사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더는 죄책으로 살지 않고, 어떤 사람의 지배를 당하지 않으며, 절박함에 이끌려 서둘러 아무 거나 취하지 않고, 아무리 어떠하든 냉소적으로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사는 나라이다. 우리로 믿음을 두셨다. 소망을 갖게 하신다. 복의 비결은 환경이나 상황에 의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었다.
성경은 이를 통해 천국의 언어와 사고와 가치와 그 생활 방식을 가르치신다. 비로소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고, 이삭은 이를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되었다. 한데 자기를 위하여 자기에게 별미를 요구하며 자기로 축복하게 하려 하였으니, 비틀린 팔은 노년에 저의 생의 고충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릇됨을 선으로 취하여 사용하시는 것이다. 결국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 우리의 자랑은 하나이다.
저의 축복은 결코 저의 것이 아니었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신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창 27:37).” 내가 어찌 하려고 하면 모든 게 허사로 끝난다는 진리다. 뜬금없이 아이엄마가 고맙다며 인사를 하였다. 문자에 뭐라 할 말이 없어 ‘아니에요.’ 하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는 우수 훈련생으로 뽑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상을 받았다. 어느 선생이 자기 발표를 들으면서 울었다며 아이가 자랑처럼 문자를 했다. 앞뒤 연결 없이 그래서 내일 예배에 복지관 동생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나는 아이를 통해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을 주께 묻는 버릇이 생겼다. ‘갑자기’ 툭, 전개된 말에 나는 앞뒤 연결을 못해 생뚱맞다. 뭐라 되묻거나 꼭 전부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복이다. 그래서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임마누엘이란 그런 것이다. 새삼 천국이다.
언제든 아뢸 수 있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시 64:1).” 다른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도움을 구하여야 하는 일이 아니라, 임마누엘! 이미 완성된 나라에서 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 언어가 다르고 사고 체계가 다른 나라이다. 내가 처리해야 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7).” 나를 어렵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8).” 이윽고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9).” 정해진 나라에서.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