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세기 28:20-22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편 65:10
‘그럴 거면 하지 마!’ 하는 소리는 더욱 온전히 잘할 것을 반어적으로 일컫는 소리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전 5:5).” 하면 이를 갚기 위해 열심을 다하라는 소리이다.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6).” 모든 기도가 서원 아닌 게 있을까? 바라고 아뢰며 이를 다짐하고 약속하는 것이 기도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시점에서 그리하여 바르게 약속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 점검하고 다시 다짐하는 때이기도 하였다. 아이가 복지관 동생 아이를 데리고 왔다. 아이보다 심한 아이였다. 어떤 서글픔과 두려움이 교차하였다. 부모와 누이가 함께 산다는데 어떻게 대화가 이루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주께서 어찌 인도하실지 알 수 없어 공연히 두려워지는 마음이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하였던 본문 말씀이 한층 그 의미를 더하며 다가왔다(1). 내가 하는 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듣는다는 건 단지 소리를 듣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몸에 배고 마음에 새겨지는 일이었다. 갓난아이들을 상대로 한 실험을 하였는데 깊이 잠들었을 때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는 50%의 아이들이, 엄마의 다급한 음성에는 90%의 아이들이 깨어났다는 것이다. 단지 소리로 치면 사이렌 소리가 훨씬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이었다.
냄새가 배듯 안감에 물이 들 듯 우리가 듣는다는 것은 그리 스며져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1).” 하시는 말씀을 오래 되씹으면서 그 의미가 새롭고 가열(苛烈)하였다. 기도란 그처럼 가혹하고 격렬한 것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더욱 반증한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0-22).” 주께서 어찌 하시면 내가 어찌 하겠다는 공식이다.
우리의 맹렬한 요구는 이내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 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뜻에 맞추게 한다. 하나님께 바랄 수 없는 저들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까? 어찌 이 아이들을 맡아서 책임지고 키워가고 있을까? 아무도 몰래 혼자 생각이 많은 날이었다. 그래서 때론 억지로라도 먹어야 한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겔 2:8).”
때론 말씀보다 가열 찬 게 없다. 기도보다 허망한 게 없고 주의 뜻을 바라는 마음보다 막연한 것도 없다. 아이는 글도 말귀도 어려워하였다. 옆에서 돕는 아이가 그나마 훨씬 더 나아보였다.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할 때 우리 셋이 나란히 앉아 있으니까 딸애와 아내가 자꾸 웃었다. 배시시 웃음이 났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 하고 의아해할 때 말씀은 다시 일러 ‘네 창자에 채우라.’ 하고 더욱 드미신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3).” 생각이 많을 땐 생각을 멈추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렇게 말씀 붙들고 으르렁거릴 따름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그리하여 놓치지 않는다. 빼앗기지 않는다. 굴복하지 않는다.
종일토록 구구거리며 먹이를 쪼는 비둘기 같이,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38:14).” 말씀을 물고 늘어지는 게 기도다.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하며 그 책임을 다 주께 맡기는 일이다. 그리하시면 내가 감당하겠나이다. 하는 서원인 것이다. 아니면 내가 무슨 수로 이를 행할까? 뭘 할 수 있겠나?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는 더욱 말씀밖에 답이 없다는 데 놀랐다. 무얼 붙들고 할 수 있겠나?
나의 생각과 마음이 허탄한 데 이르지 않기를.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 그러니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손이 깨끗한가? 마음이 청결한가? 뜻을 허탄한 데 두고 있지는 않은가? 함부로 거짓 맹세를 하지는 않는가? 나야말로 어느 것 하나 변변한 게 없는 자여서!
들으라, 걸어가라, 하시는 말씀 앞에 묵묵할 수만 있다면!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렘 7:23).”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 다음은 내 문제가 아니다. 나는 저 아이 앞에 세우신 이로 인하여 그저 말씀을 전할 따름이고(말씀을 듣고), 이를 따라 걸어갈 뿐이었다.
그리하면서 내게 확실한 것은 그리 스며 내 몸에 밴다는 것이다. 뭐라 이리저리 궁리할 거 없다. 말이 많아질 일도 아니다. 걱정하지 말자. 말씀은 그리 내게 들려지고 있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 5:2-3).” 그저 다만 주만 의지할 따름인 것이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7).”
지극히 소심하고 유약한 사람이라 그런가, 내게 있어 설교란 나를 향하신 말씀이었다. 그렇게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나의 기도가 되어 서원이 되는 거였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12).” 내가 저 한 영혼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온전히 바로 알 수 있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더욱 주를 바라는 것으로, 서원이란 주가 나의 주님이시면 내가 주의 것입니다. 하는 논리의 산물이었다. 나의 요구가 어느덧 주님의 뜻과 같은 게 되어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삶의 증거로써 말이다. 어떤 서글픔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오히려 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을 더욱 절감하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최소한 나의 변변찮은 감사가 되었다.
어린 야곱이 서원한다. 얼마나 두렵고 막연한 길이었겠나. 그 노정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하고 주께 구한다. 그 바람은 순수하고 자유롭다.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는 숭고하기까지 한 과업이다. 이를 책임지시는,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하는 다짐.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는 각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는 결연한 의지. 이것은 그 자체로 주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기도였다. 나의 단순한 이해로는 그리 여겨진다. 어떤 대단한 소원으로 가증하지 않았다. 뭔가 사기꾼처럼 허황되지 않았다. 나는 이번에 새삼 서원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찬미가 아닐까? 생각하였다. 그걸 우리 스스로 빤히 이행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부모 앞에 손가락을 걸고 다짐하는 아이의 사랑스러움처럼 우리를 그리 여겨주실 수 있는, 순수함으로.
실은 이 모든 게 주가 이루시는 일이었으니,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시 65:10).” 실은 내가 뭘 잘 해서 그 대가로 나를 사랑하시는 게 아닌 것이다. 아이가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고 다짐을 할 때의 그 순수함을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게 아닐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비록 이 땅에서는 ‘아픈 아이들’로 치부되지만, 저 귀한 선물을 그 부모들은 어찌 받아서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 그 당사자들의 날들은 또한 어떠한가? 이내 주가 이루신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앞에서 주가 책임지신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11-12).” 우리의 남은 날들이 그러하여서 주의 은택으로 이처럼 지난 한 해도 관 씌우시기를.
그 길에는 주의 은총이 가득하여 꼴을 먹여주시니, 나의 날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고스란히 나의 고백이 되어 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2-3).” 내가 감당할 수 없음을 더욱 절실히 느끼면 느낄수록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4).”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