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창세기 29:25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편 66:20
‘아침에 보니 레아라.’ 그 수고가 애달프다. 7년의 기다림 끝에 얻은 결과이다. 저의 절규하는 소리가 민망하다.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성경은 우리에게 상상하게 하신다. 그 아침 야곱의 절망을 생각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어제 읽은 성경을 떠올리게 된다.
곧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 자기의 유익을 구함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거였다. 전도서는 12월에 읽기 좋은 성경이었다. 나는 서성이며 소리 내어 읽었다. 필사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해보았고(2장),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10).”
그 무익함에 대하여 오늘 아침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애써 공들여 수고하였던 게 허사라. 그 세월은 가중되었고, 그럼에도 이를 선으로 바꾸어 12지파가 생성되었다. 성경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임을 알리신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이는 우리에게 확신을 더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지으신 이가 또한 조성도 하신다. 다루시고 이루신다.
주일 날 같이 왔던 고3 아이가 계속 전화를 하였던가보다. 말도 어눌하고 문자도 숫자도 약한 아이였다. 어떤 약을 먹지는 않는다고 하니 감정의 문제는 아닌 정신지체장애인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나름 좋다는 표시일 텐데, 그 주체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딱 끊으라고 할 수도 없었고 다 받아주라고 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어찌 하려고 할 때, 아이들보다 어려운 난제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리 말씀하신 것일까?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앞뒤 분간도 못하고 자기 고집과 그 아집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할 뿐인데, 오히려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 하심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7).” 지혜의 이정표 같은 말씀이다. 그저 직진만 있을 뿐이다. 자기감정에만 충실한 것이다. 그것이 때론 허망하나 또한 주를 바라는 데는 올곧은 자세를 잃지 않게도 한다.
지능이 멈춘 아이. 그 지점에서 저는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나는 날마다 아이를 마주하고 있으면서 마치 그때마다 빛을 투과하는 스펙트럼을 통해 감정을 목도한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들이 그 예이다. 가령, 그럴 땐 네가 주의를 주고 안 돼, 하고 말해줘! 하였더니, 애가 환하고 착해서 그래요! 하는 대답. 자신은 복싱을 좋아하는데 상대를 때릴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는 말. 배가 아프니? 하고 물으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하는 대답. 그때마다 나를 웃게 하신다.
처음엔 그 대답이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웃다가 나중에는 그 안에 심오한 뜻이 있어서 또 웃는다. 오전에 나눈 그런 대화가 마음에 걸렸던지, 녀석은 오후께 일 잘 끝내고 집에 왔다며 인사를 남기다 말고, 그 애가 착하다는 소릴 하였다. 앞뒤 맥락도 없이 갑자기 말이다. 나는 여기서 저기, 그 간극의 여백을 생각하고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마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러한 요구를 하시는 듯하다.
상상 없이 그 의미에 동참할 수 없는 게 비유적인 언어이다.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 13:34).” 비유는 강제하지 않는다. 가만히 참여를 유도하는 여백을 활짝 펼쳐놓는다. 생각의 여지가 다양하다. 그 진리는 하나인데 얼마든지 뛰어들게 하신다. 전도서를 읽으면서 그 의미가 새로웠다.
초상집에 가라니!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니! 우리의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이다.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전 2:16).” 유독 나는 함의적인 전도서의 언어를 좋아한다. 한참씩 씹고 또 씹어도 그 맛이 계속 나오는 찰진 칡뿌리 같다. 잘근잘근 씹다보면 어느새 입안 가득 탄성이 고인다.
그렇게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6:9).” 그러니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10).” 죽어라 하고 기를 쓰고 살아도 모자랄 세상에서, 다들 저마다의 노력에 애씀에 기진하여 쓰러질 판인데,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11).”
돌아보면 잘난 사람이니 못난 사람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12).” 그러니 천년을 수없이 살아 나름의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고 한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6).” 그러므로 나는 마치 멈춘 지능으로 살아내고 있는 아이의 하루가 경이롭다.
금세 돌아서면 잃어버렸다. 아침에 뭘 먹었는지, 돈을 손에 쥐고도 지갑을 열어 찾고 있으며, 누구에 대해 이야기하다 말고 점심에 무얼 먹자고 말해버리는! 이상하게 나는 자꾸 웃음이 난다. 유쾌하기까지 하다. 구김이 없는 의식의 흐름이라니. 주 앞에 우리가 섰을 때 우리는 이처럼 어린 아이와 같이 맥락도 없고 좌우 분간도 없이 오직 어미의 젖을 물고 늘어지는 것처럼 주만 바라는 것은 아닐까? 재고 따지고 이치를 운운하여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고 정의 내리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아이는 그때마다 ‘은, 는, 이, 가’ 주격조사를 붙여 하나님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떠하신지. 그런 우리를 두고 예수님은 다시 주께 아뢰시는 것이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 13:8).” 올해도 그냥 두소서.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하시면서! 나는 이처럼 별 생각 없이 말씀을 읽다가 헉! 하고 숨이 멎을 것처럼 놀라는 것이다. 아이와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설명하고 질문 있니? 하였을 때 아이의 생뚱맞은 질문을 받고 헉! 하고 또 놀라고는 하는 것이다.
결국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그 헛되고 헛됨에 대하여,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내가 아이를 대하면서 바라고 꿈꾸는 이상과는 달리 아이는 나를 피로하게 하고 때론 마음 상하게 하지만 그 여운이 나를 일깨우기에 충분한 것이다. 꼭 은유 같다. 비유 같은 아이다.
다 저녁에 친구가 전화를 하였다. 다음 날 시간이 되는지, 점심께 들를까 한다며 잠깐 운을 떼는데 그 조카아이가 또(?) 어떤 문제를 일으킬 모양이다. 그저 ‘눈이 풀렸다.’는 표현을 써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좀이 쑤셔서 더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소년원에서 나와 더는 이제 미성년자가 아니어서 다들 긴장하는 것이다. 늙으신 노모가 손주의 일에 너무 신경을 써서 기절하기 일보직전이라. 그런저런 말을 하고 싶어서 온다는 것인데, 나는 전화를 끊고 저녁을 먹었다.
주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꾸 내게 이런 일을 부여하시는 것일까? 다소 서글픈 까닭은 내가 너무 부족하고 나 하나로도 힘에 겨운 사람이라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그저 염치불구하고 앞뒤 가릴 거 없이, 맹목적으로라 해도 주만 바라는 것이었다. 주가 아니시면 난들 알겠나? 그리 두시니 또 그러시는가보다 하여 주님만 더욱 의뢰하는 수밖에. 언제부턴가 나의 선택의 여지는 점점 하나밖에 없어진다. 다른 데 기웃거려 도움을 구할 게 없다.
나의 몫이라.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 3:22).” 내게 두실만 하여 나로 여기에 있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나로 웃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었다. 그 뒤에 무슨 일인지 알려고 해도 앞설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게 인생이었다. 그저 맡기신 한 날이라! 그럼 여기서 붙들 수 있는 가장 최선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나는 요즘 이 말씀을 자주 웅얼거린다. 말씀이 나와 함께 거하신다는 것. 그럼 됐지 뭐! 고로 말씀이 하실 일이어서 나는 더욱 말씀만 의지할 따름이다. 할 말이 없으면 입을 다물 뿐이고, 어이없어서 웃든 유쾌하고 통쾌해서 웃든, 웃음 뒤에 감추고 계신 주의 놀라운 뜻을 깨달을 수 있으면 복이다. 주께서 그 지혜도 더하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그래서 놀라웠다.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하는 야곱의 절규가 실은 저도 저 자신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황당함, 주체할 수 없음 앞에서, 우리는 이내 하나님을 부른다. 우리의 부름은 우리로 찬송하게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20).” 저의 그 시점에서 황당하였던 그 일이 기어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형성하는 기틀이 되게 하실 줄이야!
다만 우리가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씀,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오늘 이 일 너머에 어떤 일이 또(!) 있는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겠으나, 다만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 결국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 3:10).” 고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7:13).”
그러므로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곧 어떠하든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 거였으니,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 66: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