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창세기 32:1-2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시편 69:6
금세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으면서도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창 32:7).” 이렇게 저렇게 살 궁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시 69:5).” 하고 주 앞에 선다. 누구보다 나아서 혹은 좀 능력이 되어서 그리 행하는 게 아니었다.
묵묵히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를 만나신다. 이는 하나님의 군대다.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창 32:2).” 주가 도우시는 이심을. 곧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 10:14).” 고로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함이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결국 아이엄마는 복지관 선생에게 전화를 하였고 자초지종을 듣고 전하여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게 하였으니, 심지어 고3 아이가 주일 날 오는 것도 주의하여 그리 못하게 하였다. 종종 발작을 일으킨다며 아이가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서로가 문자로 미안하네, 미안했네 하면서 주고받은 내용이 안 됐다. 결국 그리 되었구나, 싶어서 더는 뭐라 할 수 없어 아이의 일기를 같이 읽고 성경공부를 위해 아이가 기도를 하였다.
한데 그 내용 가운데 자신을 ‘물건 취급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표현에서 가슴이 아팠다. 장황한 내용과 과장된 어휘선택으로 기도 내용은 겅중거렸으나 그리 여겨지는 자신을 주께 바라며 위로를 구하는 내용에서 울컥하였다. 아무 생각도 없고 그저 어리숙한 것으로만 알지 정작 본인들이라고 왜 느낌이 없겠나.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이쪽과 경계를 당할 수밖에 없는 저쪽의 간극이 너무 멀어서 아득하였다.
어려워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인데, 초딩 수업을 하면서도 일이 터졌다. 늘 뺀질거리는 아이와 그리 당하여 또 심통을 부리고 물건을 던지고 울어버리는 아이를 나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울게 두었고 토라져 혼자 심통을 부리는 걸 그러라고 두었다. 그런 와중에 동기 전도사가 전화를 하였고, 저도 학원에서 아이들을 상대하면서 생기는 울렁증을 호소하여 안쓰러웠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뒤미처 중딩 아이들이 오고, 나는 소진된 사람처럼 의욕이 없었다.
정말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단 소릴 하지 않는 시대이다. 누굴 뭐라 하며 좀 낫다고 여기는 이쪽이나 이런저런 문제로 거리를 둬야 하는 저쪽이나, 아무 것도 해줄 수 없고 해줄 게 없어 속상해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한 듯 나 몰라라 하는 나의 태도가 또 못마땅하였다. 주초에 잡아두었던 본문을 바꿔 설교 원고를 다시 초안하였다. ‘기억하라.’ 하는 말씀이 자꾸 뇌리를 붙들어서 말이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누군 늘 바쁘다.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러는 자신을 되레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같다. 저 또한 안 됐고 불쌍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기도를 가르치신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그러니 바쁘다는 건 역설적이게도 걱정이 많다는 반증이다.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긴다. 다른 데 정신을 두고 그리 몰두하려는 것이다.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 5:3).”
두서없이 자신을 변호하는 말이 많아지는 건 그 때문이다. 다 헛되다.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11:10).” 악이란 그리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이다. 공상이 늘고 몽상을 선호하느라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미루게 되고 일반화시켜 ‘다 그렇지 뭐’ 한다. 결국 꿈이 많아지면 일에 쫓기는 것이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그런 우리는 어쩌면 좋을까?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5:7).”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막연한 소리가 아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때가 악하다는 건 ‘다 그렇지’ 싶은 것들로부터 자신도 무방비상태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지’ 하는 것들이 늘어가고, 뭐라 하면 자신을 두둔하고 변호하느라 열을 올린다.
그래서 주의할 것을 성경은 이른다. 지혜 있는 자 같이 세월을 아끼라고 한다. 허튼 데 마음이 쏠리지 않게 하고 괜한 불안이 우리로 일에 쫓기게 해서는 안 된다. 바쁜 게 능사가 아니다. 늘 보면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자꾸 일이 터진다. 그런 팔자인가보다 하고 자신을 방치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또 그게 싫지 않다고 하니, 어디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 길이 없다.
아이를 둘러싼 그 주변의 인물들이 교훈이라. 자꾸 내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그런 와중이라 아이의 마음을 헤아릴 길 없고, 그러려니 하고 규제하고 억압하고 다스리려 하는 것을 두고 아이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 같으나 ‘물건처럼 취급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주께 호소하는 것이다. 공연한 측은지심이 다가 아니다. 저 한 영혼을 내 곁에 두시는 데는 주의 오묘한 손길이 전방위적으로 나를 에워싸기 때문이다.
마음이 한참 어렵다가도,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하시는 말씀 앞에서 안도하는 마음의 출처는 무엇일까? 이 모든 게 다 지나갈 것인데, 그러니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전 6:6).” 말씀 앞에서 나를 붙든다. 내가 요동하여 될 일도 아니고, 그래서 고3 아이가 주일에 마저 오지 않기로 했다는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고작 그런 것을. 하나님의 군대로 호위하심을 받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떨며 이리저리 살 궁리를 모색하고 있는 야곱의 모습이 내가 아니겠나? 행여 나는 나의 이런 못난 모습 때문에 누구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저로 욕이 될까 두렵다. 그 기도를 같이 되뇐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시 69:6).”
어떻게 말로다 위로를 줄 수도 또는 그의 일을 떠안아 대신 짊어지고 살 수도 없는 것이면서, 나는 또 나대로 고달픈 것이다. 추워지는 날씨에 어디가 자꾸 아프고 마음은 어렵고 어떤 불안이 또 근심이 나를 엄습하기는 여전하여서, 그저 어디 요양원에라도 들어가서 숨었으면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나? 학교까지 자퇴하고 아예 집에 들어앉은 녀석에게 전화라도 해야 하는데 어제도 그제도 바빴다는 핑계로 미적거린 것이다. 거기까지 마음을 쓸 여력이 없었다.
우리가 사는 날이 그리 정해져 있는 것에 대하여, 그러므로 더욱 무엇을 붙들고 씨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영적인 싸움이라. 누구는 마흔을 훌쩍 넘긴 마당에 박사학위를 따느라 몇 년째 시간과의 다툼이다. 거기다 자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이 생기고, 이를 자신의 팔자소관으로 치부하며 바쁜 게 좋다는 소리로 위안을 삼으려고 하니. 다들, 그래서 안녕하신가? 그 영혼이 평안하신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런 나에게 말씀은 <기억하라> 하시며 메가폰을 드시는 것 같다. “너는 기억하라.” 누가 우리를 구원하여 인도하셨는가(신 5:15). 또한 그때마다 도우시며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그리 다루실 것임이다(신 7:19).
또한 광야 길을 걷게 하신 이를 기억하고(신 8:2, 개정), 그때마다 함께 하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18).” 저를 ‘거역하였으되’ 긍휼하신 이를 기억하고 (9:7), 우리를 속량하신 이를 기억하라(15:15, 24:18). 결국 “우리가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24:22).” 그리하여 “옛날을 기억하라(32:7, 사 46:9).” 기억하라. 기억하라. 연거푸 말씀하시는 내용을 찾아 음미하는 동안 내 안에 일던 온갖 서러움이랄까 어떤 서글픔 같은 것이 참으로 부질없음을 알게 하셨다.
결국 우리는 한 소리로 만난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시 69:1).” 때론 근심의 물과 어떤 당위적인 자책의 물과 누구를 향한 공연한 측은지심의 물살로 인해 내가 가라앉게 생겼을 때, 나는 비로소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5).” 내가 얼마나 우매한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주께서는 어찌 이처럼 귀히 여겨주시는지.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13).” 때로는 날마다 수렁이라,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14).” 이와 같이 주께 호소하고 아뢰어 말씀 앞에 세우시는 일이 복되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17).” 고로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29).”
하여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30, 33).” 곧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35).” 하여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3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