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창세기 36:6-7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편 73:1-3
어떠해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말씀 앞에 가만히 손을 모은다. 마음이 허하여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잘 된 일인데 잘 된 일인지 모르겠고 그저 안쓰러움과 우려가 목을 조이는 듯하다. 또 그런다! 하고 아내가 핀잔을 주듯 말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만으로 7개월째를 넘기고 있었다. 거의 매일 오던 아이여서 더 허전한가보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겨울 동안 하루 일과 계획을 세우고 점심을 먹고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당장 다음 날부터 훈련 받던 빵공장으로 출근을 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오전 아홉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니 꽉 찬 하루였다. 결례인 걸 알면서도 나는 복지관 선생과 통화를 하였다. 나름 자기들도 관리를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엄마와도 카톡을 하였다. 뭐라 내가 나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겉으로 볼 때와 곁에서 볼 때가 다르고, 단답형으로 대답할 때와 대화를 할 때가 다르고, 잠시 무얼 할 때와 연이어 무얼 할 때의 체력도 집중도 마음도 다른 것에 대하여 나름 전문가 지도 선생과 그 엄마 앞에서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 답답하였다. 들뜬 마음의 아이에게 당부하고 이르고, 손을 잡고 기도해준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부였다. 여느 날보다 늦게 아이가 돌아가고 나는 어떤 서글픔인지, 안타까움인지, 서러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둘려야 했다.
나는 시끄러운 구호나 과장된 표현을 혐오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다닌다고 해서 사람들이 회개할 거라 여겨지지 않는다. 꽃을 나눠주며 세계 평화를 외친다고 해서 평화가 찾아올 거라 생각하지 않고, 노란 리본을 달고 서로를 위로하고 화해와 평화를 구한다고 될 일이 아니며, 글자를 깨우친다고 해서 무지함을 떨쳐버릴 수 없듯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요란한 트리나 장식으로 온 거리를 에워싼다고 해도 세상이 아기 예수를 바라고 축복할 것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서로는 각각 무엇이 진리인지 궁금해 하면서도 정작 그 답을 듣지도 않고 돌아섰던 빌리도와 다를 바가 없다. 당장 아이의 취직이 우선인 게 아니라 며칠만이라도 따져보고 서로 조율하여 시간을 좀 가졌으면 좋겠구먼! 녀석은 시급을 계산하여 무조건 할 수 있다고만 하고 그 엄마나 선생은 서로가 우려하고 걱정하나 그저 잘 될 거라고만 하면서 우선 디밀어 보는 것이었으니. 괜찮다, 다 잘 될 거야! 하는 말처럼 헛되고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
괜히 심통이 난 사람처럼 속상하였다. 복지관 선생과 통화까지 한 건 좀 결례가 될 일이었다. 아이엄마에게 더 뭐라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아이가 돌아가기 전에 아이 손을 잡고 주께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구하였다. 믿는 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나에게는 달리 붙들 게 없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 나에겐 이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삶이 있을 뿐이었다. 주께서 선히 인도하여 주실 것을. 중도에 또 상처를 안고 돌아오게 될지 혹은 그렇듯 잘 적응하여 사회의 한 일원이 되어 살아갈 수 있을지. 정작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한 의’다. 성탄절을 앞두고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시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실현된 실체의 사람, 아기로 오신 예수가 우리 곁에 계시고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거한다. 우리가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모든 게 충만하게 실현되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나와 너,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과 같은 이 일의 진행도 주가 다루시고 지키시고 이끌어 가실 것이다. 곧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말씀으로 기록된 글로써 존재하는 역사적인 하나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말씀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은 죽었다고 한 프레드리 니체는 말했다. ‘모든 진리는 몸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리 이루어졌고 오늘도 실재로 우리 곁에 우리의 일상으로 존재하시는 이시다. 그저 다들 사느라 급급하고 주어진 날에 허덕이기 일쑤인 넌덜머리나는 일들과 약골인 체력과 지긋지긋한 바쁨과 그 바쁜 일상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의다. 나는 공연히 속상하고 서럽고 불안하고 안쓰러워서 빌빌거리다가도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우리 삶에 나타나셨다는 데 안도한다.
주가 이루실 것이다. 누군 늘 바쁘다 못해 계속 일이 터져 누가 죽고 또 장례를 치르는 중에 그 아들이 혼수상태가 되어 응급실에 실려 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데도 일은 계속 되어 짜증이 목구멍까지 찼으니, 그런데도 뭐라 이르면 도무지 자신이 답답해하는 것에 대해 정작 답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온통 다 빌라도뿐인 것 같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요 18:38).” 서성거리며 어떤 우울한 마음에 나는 말씀 앞에 손을 모을 뿐이다.
무수한 족장이 생겨났고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다.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창 36:6-7).” 이에 가만히 보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슬픔뿐이라.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1-3).” 우리의 결론은 그저 그렇게 끝이 나는 것일까? 그 오랜 기다림 끝에 얻어지는 답이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이런저런 말 할 수 없는 마음을 들고 주 앞에 손을 모은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단순히 성경 속에 예수가 전부가 아니었다. 말씀 외에 한 의가 있었으니 하나님의 한 의는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심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주의 길을 보여주시기를,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
주께 아뢰는 일. 저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주시기를,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18).” 아이를 오게 하신 이도, 이처럼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하게 하시고 여러모로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며 의지하게 하셨으니, 주는 나로 반석 위에 서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21).” 그리고 영광이 지나가신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22-23).” 나를 세우시고 나를 보호하시며 나의 엎었던 손을 거두실 때, 나는 주의 등을 볼 것이다. 그 행하시는 일들을 말이다. 주가 인도하심으로 오늘까지 오게 하신 이가 또한 남은 걸음도 함께 하실 것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볼 것이다. 성경이 그리 증거하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 주 앞에 온전히 세우시려고,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7).” 주의 빛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9).” 내가 이처럼 안달하고 조바심 내고 어떤 우려와 염려로 주께 아뢰는 일조차 그리하라고 두심이었다.
아이를 응원하되 잘 될 거야, 하는 기대가 아니라 분명한 확신이었다. 곧 우리의 복은 하나였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앞서 저들의 형통함과 이 땅에서의 잘 됨이 전부가 아니고, 죽을 때도 호의호식하는 게 복이 아니었다. 오직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