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창세기 37:11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편 74:16-17
누구는 시기하고 누구는 간직하였다. 누구는 표적을 구하고 누구는 지혜를 구하였다. 누구는 주를 멀리하였고 누구는 주를 바라였다. 누구는 여러 것으로도 충분하지 못했고 누구는 하나로도 충분하였다. 누구든 변하거나 자라거나 퇴보한다. 아무 것도 아닌 누구는 없다. 이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말씀을 되새기다보면 무엇을 붙들고 무엇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하신다. 이런저런 고약한 상황에서도 무얼 간직하고 무얼 구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 종종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앞에서 난처하다. 어떤 지경의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는데, 하고 싶은 말과 해주어야 하는 말이 의미 없게 여겨질 때 난감하다. 그럴 때면 저들 하나하나가 '지혜가 외치는 소리' 같이 들린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잠 1:20-21).” 나에게 들리는 것을 저희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나에게 보이는 것을 저희에게 들려주고 싶은데,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22).”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내 안에서 요동치는 하루였다.
과년한 여식이 어디서 누구와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행여 누구와 동거를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 부모는 서로 부딪치는 게 싫어서 외면하였다. 말해봐야 자꾸 불화만 생기느니 서로 방기함으로 모르는 척 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내가 그 애 엄마를 좀 아는데, 아이가 어릴 때는 그처럼 못살게 굴 듯 참견하고 간섭하고 여기저기 학원을 옮겨가면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일명 극성스런 여자였다. 한 번은 아이가 글방을 하도 좋아하니까 임의로 끊고 내게도 전화를 걸어 애가 오지 못하게 막으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아이의 감정은 모두 그 엄마의 조종 아래 있었다.
했던 아이가 장성하여서, 유학을 운운하고 나름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참 통화를 하면서 그저 속이 답답하였다. 저들 부모는 자식의 영혼이 문드러져 있는데도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여겼다. 저들이 제공하는 좋은 여건과 환경이 오히려 아이의 왜곡된 심령을 더욱 뒤틀리게 하고 있었다. 어디에 작업실을 내고, 포토폴리오를 만들어 유럽 어디 유학을 떠날 것이라는 아이의 말이 나는 참 안타깝게 들렸다. 어느덧 스물여섯, 더는 내 기억 속의 아이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누구는 표적을 구하고 누구는 지혜를 구한다.’ 종일 이와 같은 말씀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 1:22).” 무엇도 감당이 안 된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어떤 기사와 표적에 관심을 더 쏟고, 일상보다 나은 획기적인 변화를 바란다. 종종 우리의 신앙은 바라는 기적 때문에 질 낮은 믿음으로 추락한다. 나는 아이에게 그 모든 것보다 더 귀한 게 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23).” 다를 바 없이 ‘십자가의 도’를 거리끼는 자로 사는 까닭은 정작 그 너머의 기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포하고 있는 표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친구와 모처럼 통화를 하였다. 고3 아들이 예상했던 대로 수능을 망쳤다. 어디 아무 대학이라도 갔으면 하고 바라는 게 전부였다. 가장 큰 문제는 아들이 전혀 문제의식이 없다는 거였다. 그저 무기력하다는 데 복장 터질 일이다.
그런데 이제 고2가 되는 둘째 아들이 더한 셈이니, 친구의 낙이 없다. 그의 처가 낳은 산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때 아니 그 전부터 어찌나 극성인지, 마치 두 아들에게 전부를 바친 여자처럼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여하고 참견하였다. 숙제를 못하고 문제를 풀지 않으면 새벽 두 시고 세 시고 잠을 재우지 않았다. 시험 때는 자신이 곁에 붙어 앉아 같이 밤을 지새웠다. 종종 듣던 이야기로는 거의 ‘정신병 수준’이라며 혀를 끌끌 찰뿐 정작 친구는 아버지로서, 가장으로 그 모든 일을 방기했을 뿐이다.
자꾸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 되었으니, 그의 처는 신학을 공부한 여성이었다. 한데 더는 교회도 나가지 않고 사느라 전전긍긍하는 처지로까지 전락하였다. 그래서 친구는 더욱 믿는 사람을 싫어하였으니, 내가 어떤 말을 한들. 나는 이들 부부와 오전에 통화하였던 아이의 부모가 중첩되어 어지러웠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외면하며 사는 사람들의 행색이 말이 아닌데, 그걸 그렇다고 하면 오히려 나를 우습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이기도 하여서.
문득 드는 감사가 내 안에 두시는 믿음이었다. 저들처럼 안 믿고 못 믿는 게 정상적이지 않겠나? 믿어지는 이 믿음보다 더 큰 표적과 기적이 또 있을까? 아이가 퇴근하면서 카톡을 주었다. 일은 어땠는지, 사람들은 잘해주었는지, 몸은 어떤지, 나는 물어볼 게 너무 많았다. 아이의 들뜬 내용이 다행이었다. 좋았고, 감사하였고, 모든 게 신난다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튼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라? 하고 답을 대신하였더니, 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도할게요! 하고 답이 왔다.
갑자기 와락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감사하는 마음인지, 안쓰러움인지, 돼먹잖은 측은지심인지, 나는 그 감정을 알 수 없었으나 오열하듯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저런 잘난 아이와 잘난 부모들 이야기에 마치 탁한 공기로 답답하던 마음이 아이의 단순하고 명료한 대답으로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래, 토요일에 성경공부하고 점심도 먹고 당구도 치자, 하고 답을 주었더니 아이가 앗싸, 하며 즐거워하였다.
우리는 고상한 사람들이다. 품위가 있고 격이 다른 삶을 산다. 이는 의무이면서 권리이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를 전혀 다른 신분으로 바꾸어놓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나는 친구의 처를 보면 가장 안타깝다. 저가 잃어버린 신앙으로 자식과 신랑을 건사하지 못하였다. 허당에 놓인 저들 영혼을 저는 여전히 문제의식 없이 여긴다. 무슨 화장품 다단계를 하며 심지어 내 주민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단다. 자기 밑으로 심어서 뭘 어쩌고 하는 친구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자유를 주셨으나 그 자유를 잃어버린 삶이 어떠한지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혜서 같다. 친구는 뱃속에 뭐가 자란다며 곧 수술을 해서 열어봐야 할 거 같다고 했다. 인공으로 심은 두 고관절에 문제가 있어 그토록 고통스러운가했더니 그건 또 허리 자체로 문제가 있다고 했다. 마치 남 얘기 하듯 하는 저의 겁 없는 영혼은 나를 오히려 두렵게 하였다. 새로 집을 증축하고 두 세대를 더 받아 세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혀를 내두를 판이었다. 지금 그게 대수인가!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나는 저들과 통화하며 내가 말할 수 없는, 대답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주의 관여를 바라였다. 오히려 정신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고, 힘겹고 어렵게 주어진 생을 살면서도 그 안에서 감사하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할게요.’ 하는 대답을 ‘무슨 일 있으면 기도할게요.’로 답하는 아이의 높은 신앙과 믿음을 나는 감사하였다. 신앙은 존재의 문제이다. 어떤 이상과 현실 그 사이의 모호한 희망도 소망도 아니다.
살아내고 살아가고 살아드리는 그 자체이다. 신앙은 헛된 야망이 아니다. 표적을 구하며 여전히 ‘불붙은 가시덤불’ 앞에 서 있는 게 아니다. 광야에서 먹던 ‘만나의 맛’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게 아니다. 자라든가 변하든가, 퇴보하든가! 사람의 영혼은 어쨌든 변한다. 정작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는 대답할 말이 없어 난감하였고 난처하였고 난망하였다. 듣다 지겨운 저들 사연을 두고 내가 뭐라 한들.
나는 저녁께 아이의 짧고 간단하였던 문자로 인하여 오히려 크게 은혜를 받았다. 감사가 터져 나왔다.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라.’ 하는 나의 당부에 ‘네, 무슨 일 있으면 기도할게요.’ 하는 아이의 대답이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었다. 누구는 시기하고 누구는 마음에 간직하는 일에 대하여,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창 37:11).” 그 모든 게 주의 것임을.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이와 같이 완전하고 분명하신 말씀 앞에서 나는 안도한다. 때론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9).” 어떤 답답함으로 주 앞에 엎드릴 때, 오늘 말씀은 이를 일거에 해소하는 간단명료한 대답을 주시는 것 같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