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창세기 40:8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편 77:10
어떤 일에 있어 하나님에 대해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맞나? 이 길이 아닌가? 정말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계시는 것일까? 어렵고 힘들 때 주께 구하면서 동시에 내 손도 놓을 수 없을 때, 주를 찾았으나 위로가 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시 77:2).” 무진 애를 쓰며 사는 친구의 입에서 종종 듣는 소리였다. 하나님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내 음성으로. 그러면 내게!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1).” 지금 요셉의 심정도 그렇지 않을까? 바로 왕의 측근인 두 힘 있는 관원이 같은 옥에 갇혔다. 저들이 꿈을 꾸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창 40:8).” 그 근본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지만.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14).” 어린 요셉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15).” 억울함이 그 속에 있다.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만, ‘나를 건져 주소서.’ 하는 하소연을 저에게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는, 어쩌겠나? 종종 하나님께 서운하고 답답할 때도 있는 것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23).” 사람을 의지할 때 오는 결과에 대해 묵상하게 된다. 도움을 청할 데가 거기밖에 없어서, 그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져서. 종종 우리는 기대하는 것이다. 번번이 사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그렇게 사람을 의지하게 되는 일이다. 결국 ‘이는 나의 잘못이라.’ 깨닫기까지.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 77:10-11).”
비로소 회복하는 것이 주가 내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함이다. 왜 우리는 번번이 은혜를 다 지나서야 느끼곤 하는 것일까? 종일 서성거리듯 설교 원고를 정리하였다. 이번 주일은 아버지가 오신다. 아버지의 설교 원고를 미리 받았다. 성탄절 예배 때 필요한 말씀을 준비하였다. 폴 투르니에의 <노년의 의미>를 천천히 읽었다. 며칠째 딸애가 야근을 하여 밤늦은 시간에 저쪽 환승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할 것 같은데, 아이가 빠지니까 아내가 기운을 잃었다.
하루는 뒤섞여 무질서하게 돌아간 것 같으나 나는 무심히 할 수 있는 것을 하였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규칙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더 쉬운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며, 가장 쉬운 건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승복하는 것이다. 스스로 애쓰는 수고가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를 미처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깨닫기까지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을 요셉의 2년 세월로 되돌아보게 한다. 저가 기억하여 바로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이는 나의 잘못이라.’ 비로소 다시 더듬어 주의 일을 기억한다. 그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를 떠올린다. 이는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건 이처럼 자신만이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돌연 이를 잊을 때 우리의 기도는 하소연이 되고 넋두리가 되고 푸념이 되어 스스로를 위로할 뿐 정작 하나님께 바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구실이기도 하다. 늘 바쁜 누구의 분주함이 나에게 새로 경각심을 주었다.
바쁜 일상을 푸념하고 하소연하고 넋두리하면서도 정작 조용히 쉴 수 있는 시간이면 미루어두었던 기도도 말씀 묵상도 호젓한 쉼도 도외시하게 되는 것이다. 주 앞에서 쉴 줄 모르는 사람의 분주한 일상은 어떤 위로에도 만족함을 얻지 못한다. 또 다른 일을 구사하고 어찌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궁리하는 게 낫지 가만히 앉아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는 고백이 도무지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시간에 뭐라도 해보는 게 낫지, 왜 그러고 있어? 하는 자기 안의 소욕이 자신을 못 살게 구는 것이다. 대체로 모든 분주함은 그와 같은 자기 욕구에서 기인한다.
그럴 때 주님이 안타까이 부르신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눅 10:41).” 많은 일로 많은 만족을 얻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것이 염려가 되고 근심을 더할 뿐이다. 그러니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2).” 나는 종종 저를 볼 때면 마르다 같아서, 그런 사람의 특징은 뭐라 일러줘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누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좀 봐달라며 바쁜 일상을 푸념처럼 늘어놓았다. 두 아이 엄마로, 전문 직업인으로, 만학도로 뒤늦게 논문을 준비하며 학업을 더해가는 자기 계발자로 사는 어려움을 토로하다 그 말끝에, 내가 이러고 살아! 하는데 감사보다는 투덜거림이 느껴졌다. 하나님을 우리 사람도 닮을 수 있는, ‘공유적인 속성’에 대해 읽고 있을 때였다. 왜 우리는 주가 다 아신다는 데서 안도하지 못하는 것일까? 뭘 더 어떻게 잘해야 할 것 같아서 그처럼 애쓰는 것일까?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9).” 누가 누구를 알고 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주만이 홀로 우리의 마음을 아심이다. 이를 우리가 분간할 수 있는 덴,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 15:8-9).”
문득 주를 바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이고 힘이 되는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몸의 이런저런 어려움에 있어서도 주가 먼저 다 아신다는 데서 외롭지 않다. 엉덩이가 아파서 바른 자세로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한다. 그러니 자꾸 비스듬히 기대고 비틀어 앉았다가 한동안 일어서서 책을 본다. 그럼 또 허리가 아파서 도로 앉고, 섰다 눕고, 누웠다가 다시 앉고. 누구 거저 준 지팡이가 턱턱 걸리는 소리가 나서 내가 새로 샀다. 이제는 걸을 때 다리가 끌려 자주 비틀거려서 말이다.
누군 엉덩이 근육이 없어서 그렇고 다리 근력이 쇠해서 그렇다며 운동을 운운한다. 것도 여의치 않아 뭐라 답을 하려다 보면 비루하여 변명 같아서 말을 않는다. 이런 식으로 누구에게 어떤 대답도 또는 뭐라 설명하기가 난처한 때에, 마리아의 대답은 일품이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 앞서 저는 회의하였고, 반박하였고, 나름의 논리를 폈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 어떤 황당한 일의 대명사가 기력이 쇠하고 나이가 든다는 것 아닐까?
예전 같지 않은 몸의 반응에서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뭐라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는 하루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래서 말씀을 준비한다. 다시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끌어당긴다. 출력을 하고 교정을 보고 다시 글자를 나열한다. 오후께 받은 아버지의 원고를 정리하고, 주보를 다시 만들고, 성탄절 설교 원고를 얼추 완성하였더니 하루가 또 금세 지났다. 어쨌든 더해지는 한 날 한 날의 일상 가운데서 문득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는 이와 같은 고백이, 자세가 가장 쉬운 거였다.
어차피 성령으로 되는 일이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다. 곧 저는 임마누엘이시라. 지난날 나의 모든 날들 가운데 함께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나는 요즘 이 말씀이 참 좋다. 이래저래 마음이 어렵다가도.
말씀이 함께 하신다. 내가 목사여서 가장 좋은 것은 싫어도 설교 원고를 위해서도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아뢰는 수밖에.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며 그 글의 모든 근거를 자꾸만 말씀으로 찾으려 할 수 있다는 것. 누구의 어떤 일을 두고, 그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는 일. 도대체 잘 하는 게 뭐야? 하는 퉁명스런 누구의 질문에 피식, 웃고 말았지만 잘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다행이다 여겨지고 좋아진다고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시 77: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