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전봉석 2018. 12. 24. 06:56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창세기 42:5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편 79:13

 

 

한 영혼을 보고 주의 사랑으로 위하고 섬기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었다. 아버지와 아침 묵상을 마친 뒤 식탁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저 안타깝고 안쓰러워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것은 그 한 영혼이라. 부모로, 선생으로, 이웃으로, 어른으로, 또는 어떤 위치에서든 누굴 위하고 마주하는 일이란 그 영혼을 돌보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시 33:19).” 이는 하나님의 일이다. 고로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 66:9).”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풍성하여져서 주의 사랑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못나고 부족하고 모든 이의 괄시와 조롱을 당하는 것 같으나, 주께서 사랑하시는 영혼이라는 것.

 

그래서 바울의 고백은 진솔하였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 12:15).” 사랑할수록 사랑이 넘쳐나는 원리였다. 아이의 취업과 건강과 일련의 사건사고를 두고 말씀을 나누다가 그러는 과정에서 주가 함께 하심을. 그것이 곧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인 것을 깨닫게 하셨다.

 

삶이란 누구나 우연곡절로 가득한 것이어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창 42:5).” 구해야 하고 얻어야 하는 일이 있었으니,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시 79:13).” 그 사명을 우리에게 두신 것이었다. 가난이면 가난으로, 질병이면 질병으로, 부유함이면 부유함으로 그 처지가 어떠하든 사명은 그 날을 다하는 동안에 우리에게 두신 일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아버지가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시는 주일 날 아침. 아직 다들 잠든 시간에 우리 두 사람은 묵상을 끝내고 간단히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 어떤 역할을 맡기셨는지, 그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 때론 속절없음 앞에 도대체 기약도 없는 이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을 때도,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보잘것없는 나로 여기에 세우신 것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3:17).” 곧 받는 자나 주는 자나 서로가 하나이니, 이 모든 것으로 주께 영광이 됨이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2-4).” 주가 더하시는 날의 의미가 그러하였다. 온 땅에 통하는 말씀이었으니, 이는 미리 아신 자들로 그리 행하게 하심이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이는 그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맏형님이 되게 하신 일이었으니.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6).” 이처럼 말씀을 따라 말씀으로 붙들릴 수 있는 마음이 귀하였다. 아이는 아홉 시까지 오겠다고 문자를 하고 여덟 시 반에 왔다. 같이 일기를 쓰고 예배에 앞서 이런저런 말을 나누었다.

 

우리가 저를 돌보는 것 같으나 저가 우리에게 두시는 복이었다. 선대하시는 주의 마음을 저 아이를 통해 깨닫고 얻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9).” 그렇지 않으면 누가 누구를 위하며 주 앞에 설 수 있을까!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8).” 일찍이 나를 용서하시고 긍휼을 더하신 이의 그 은혜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그러므로 오늘 두신 이 자리가 귀한 사명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은 그거였다.

 

은총이다. 과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나는 오히려 내 안에서 이는 고마움이 더 크고 귀하였다. 나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신 바,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 그 목적이 있는 사랑이었다.

 

날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 그리 못난 자아로 시달리는 기근의 날들이라, 때론 양식을 구하러 저들 속에 같이 기웃거리는 신세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시 79:11).” 우리가 주께 아뢰고 바랄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자였다.

 

비록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때론 부질없는 것 같고, 공연히 소용없는 일인 것 같아서 탄식할 때도 있으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인생이란 그런 것이어서 그러는 중에 주가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구원사역의 증인이 된다. 자체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비로소 주께 고하는 한 가지,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13).”

 

주의 긍휼하심이다. 우리 안에 두시는 연민을 통해 주의 또 다른 사랑을 몸소 살게 하신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것이 아니면 우리가 무엇으로 살까? 종종 내가 아이를 위해 애쓰는 것 같으나 그것으로 주의 긍휼하심을 더욱 누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내 안의 풍성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내가 무얼 하는 게 있다면 그것이 결국 주의 긍휼하심이었다. 곧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15:9).”

 

보잘것없는 우리 교회를 여기에 두시는 것도, 저 아이 그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게 하시는 일도, 빛도 없이 그저 막연하여서 때론 양식을 구하러 온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서성거리는 것 같으나,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78-79).”

 

고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시 79: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