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전봉석 2018. 12. 27. 07:09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세기 45:5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82:8

 

 

하나님이 하신다. 그 섭리와 목적을 바로 아는 것이 구별된 자의 특별함이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이 말씀은 항상 나른하게 있을 때 새 힘을 돋운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 믿음이 붙들고, 믿음으로 지쳤을 때 이성이 돕는다.

 

모든 벌어진 일에 대하여 그 소유가 주의 것이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시 82:8).” 130억년도 더 된 3만개의 은하와 모두 수 조 개의 별들이 있고 이보다 더 많은 행성들에 대하여 우리의 이해는 감당을 못하고 우리의 믿음은 놀랍기만 하다. 자크 데리다와 미셸 푸코는 객관을 개념 자체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았고, 르네 데카르트와 존 로크는 주관을 참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저들 말에 밑줄 긋고 어느 쪽도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8:4).” 우리는 다만 주의 소유인 것이다. 성경은 이를 찬송하고 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자신이 살아온 날을 두고 요셉은 한탄하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일이 그리 된 것에 대하여,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곧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누구인지 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 45:7).” 돌아보니 모든 게 은혜였다는 고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고백이었다. 안 믿는 자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진술이었다. 주관주의자나 이성주의자나 도달할 수 없는 지혜였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8).” 하나님이 이 날을 위해 나를 이곳에 세우신 것에 대하여, 우리의 고백은 담백할 뿐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7-18).” 그리 여겨지고 주를 바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었다.

 

곧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19).” 그 일이 답답하게 여겨지던 때엔 알지 못했으나 오늘에 이르러 이보다 귀한 보배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허무한 인생일 뿐인데,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고 누구와 잠깐 문자를 하고 어떤 이와 지나가는 말처럼 안부를 묻고 다시, 하나님이 나를 두신 그 자리에서 하루를 살아내는 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람이 되어지는,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며 바울은 서신에서 그리 언급하고 있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몬 1:11-12).”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라. 비록 도망자 노예의 신분이었으나 저를 돌려보내며 이른 말이다.

 

참으로 인생이란 헛될 뿐이어서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시 109:23).” 그러할 뿐인데,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39:11).” 이를 바로 알 때 욥의 기도처럼 한 아름 고운 기도로써 주께 올려지는 것이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 14:1-4).

 

무익한 사람이었다가 이내 유익한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데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바울은 빌레몬에게 이르는 것이다.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몬 1:15-16).”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눈물은 그러하였다.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창 45:15).”

 

그리고 당부한다.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24).” 누가 잘하고 못하고는 우리의 다툼이 해결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이로써 야곱은 족하였다.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28).” 주가 더하시는 한 날 한 날의 생활이 느슨한듯하나 짜임새 있고 헐렁한 것 같으면서 조밀하였다. 주가 이루시는 날들에서 더러는 근심이 또 불평이 나를 휘어잡고는 하지만.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시 82:2).” 우리를 불러 세우시는 말씀 앞에 항상 놀란다. 본문을 여러 곳 놓고 각각 다른 메시지로 개요를 작성하다가 어느새 그게 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에 전율한다. 욥의 고백이 다윗의 증거였고, 바울의 당부가 야곱의 고백이었다. 부활의 삶은 일상의 느슨함에서 배양되고 늘 똑같은 날 같은 헐렁함 가운데서 삭혀져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힘이 되고 일상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예닐곱 명의 제자들과 함께 돌아갔다. 기가 막힌 3년의 시간이었다. 놀라운 순간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눈 먼 자를 띄우고 죽었던 자를 살리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으며, 물 위를 걸었고, 귀신들린 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했던 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그저 일장춘몽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허탈했을까? 실의에 빠져 발이 무거웠을까?

 

저들은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2-3).” 곧 자신이 가장 잘하던 일로 복귀한 것이다. 그런 중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본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7).” 일상 중으로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9-10).” 이처럼 조밀하고 촘촘한 말씀 앞에서 황홀할 정도이다.

 

그리고 재차 물으시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 이어지는 자신의 답변 가운데서 베드로는 일주일 전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였던 자신의 수치와 죄책을 직면하게 된다. 이에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말씀 앞에 비로소 승복하는 것이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15).”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명령은 조금 생경하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19).” 즉 성령의 이끄심에 대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 이와 같은 삶이 전에는 답답하였는데 이제는 자유하다.

 

나는 종일 겅중거리듯 여러 본문을 놓고 맛보았다. 내 앞에 차려놓으신 밥상이 진수성찬이었다. 각기 다른 말씀인 것 같은데 모두 하나였으니,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시 82:8).” 더는 두렵거나 미룰 필요가 없는 자리였다. 세밑 한파가 몰려오는 날이었다. 나는 마치 별천지에 있는 것처럼 따가운 햇살에 얼굴이 상기된 채 설교 원고를 정리하였다. 누구를 생각하였고 무슨 일에 대해 마음을 썼으며 저녁께는 습관처럼 아이와 문자를 나누며 하루 일과를 묻고 응원하고 축복하였다.

 

내 팔을 벌리고 내게 띠 띠우시는 이가 오늘도 하루를 열어주신다. 이내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시 82:3-4).” 내 곁에 두시는 이들로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5).” 나는 저를 생각하며 아뢰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일에 눈을 뜨는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