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창세기 49:28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86:17
은총의 표적을 보이는 삶이 되었다.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가! 함께 하고 계시는가를 보여주는 삶으로의 향기.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그런데 신기한 건 이 냄새를 각기 달리 느낀다는 것인데,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16).”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편지’일 뿐이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3).” 이를 마음에 새기고 사는 삶이 복되어서, 내가 저에게 임으로 읽혀지고 들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은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이다. 주가 더하신 한 해의 삶이 복되었다.
말씀을 전하다, 아이와 이야기하다, 나는 자주 울컥하였다. 아침 일찍 당도하여 일기를 쓰고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아이는 피곤해하였다. 늙으신 장모와 형님, 조카가 오고 우리는 마지막 주일 예배를 하나님께 올렸다. 어떤 행위에 대하여 이는 믿음의 조건이 아니라 은혜의 열매이다. 곧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9-10).”
예비하신 길을 걷는 게 은혜였다. 지혜란 그의 섭리를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삶이었다. ‘미리 정하신 것’이란 말씀 앞에 크게 안도한다. 어쩌다 여기에 이른 것이 아닌 게 말이다. 다행이란 표현도 엄밀하게는 옳지 않다. 그리 되어질 것이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5).” 그러니 오늘의 삶이 ‘어쩌다 어른’이 아니다.
그 길을 열어주신 데 대해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30).” 주의 공평하심에 감사하게 된다. 믿음으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그리 된 일이어서 감사하였다.
이처럼 말씀을 따라 들려주시고 읽히시는 것에 대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 복이다. 다른 무엇을 바랄까! 나는 형님에게 폴 투르니에의 <노년의 의미>를 선물하였다. 퇴직하면, 2년 후에, 하는 식의 말들에 대하여 지금이 아니면 그때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먼저는 훈련되어야 하는 것을 말해주었다. 하다못해 혼자 있는 시간을, 책을 읽는 시간도 훈련이 필요하고 그리 몸에 밴 것으로 충족할 수 있는 것이어서. 하물며 말씀을 의지하는 일에 대하여는 그리 연습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감기가 오듯 느닷없고 난데없는 일이어서 고난이 오면 갈등하고, 갈등이 시작하면 삽시간의 일이었다. 기도로 승리할 수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그러자면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해야 한다. 주 앞에 앉아 가만히 또 오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럴 거야, 그래야지, 하는 정도의 말이나 의지로 되는 게 아니어서. 콧물이 줄줄 흐르고 눈물이 하염없는 감기처럼 고난은 막힌 게 아니라 뚫린 것이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시 105:17).”
오늘 내게 두시는 이 모든 게 다 이유가 있었으니,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8-19).” 말씀이 나를 단련하신다는 데 놀랍다. 이는 말씀을 붙든다는 실제적인 의미와 같다. 그저 의지하고 그러려니 여기는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 이를 이처럼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고 마음을 받아 삶으로 드러내는 일. 그리스도께서도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리 하셨던 거여서.
때론 두려움이 먼저 앞서지만 그것도 더욱 주를 바라고 말씀을 붙들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경외란 두려움을 바탕으로 하는 경탄이다.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다.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이와 같은 기본적인 명제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이제 전혀 다른 삶인 것이다.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유익함이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참으로 감사하고 복된 말씀이다. 우리가 이처럼 같이 둘러앉아 주를 바라며, 주신 날을 서로 앞에서 주께 영광을 올리게 될 줄이야. 언제나 우리의 그릇됨을 가히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놀랍다. 이와 같은 주의 안위하심을 의지하다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종종 나는 그 어떤 해박한 지식과 논리적인 설명도 모두 군더더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설교 중에도 이런 설명들보다 그저 말씀만 나열하였으면 하는 충동을 느낄 정도이다. 독서에 있어서도 누구의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경험의 나열보다 저가 받은 그 은혜의 말씀에 더욱 목말라한다.
묵상글에서 점점 더 성경 인용이 나의 일상을 뒷받침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일상이 성경의 예시와 인용이 되어 확신을 더하는 것이다. 이는 전혀 새로운 일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같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 시점에서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어디에 신도시가 개발되고, 아파트가 어떻고, 청약부금이나 예금이 어떻고 하는 말로 이어지자 순간 화두를 잃었다.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 전혀 그런 말에 끼어들지 않고 관심도 생기지 않는 내 자신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전에 좋아하던 소설과 시(詩)에도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어느 철학자의 논고에도 별로 시큰둥해진 나의 독법의 변화와도 같다.
싫고 좋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전혀 그런 데 관심이 멀어진 것이 신기하면서도 감사하였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의 정의, ‘죽은 영혼은 더 이상 죄와 싸우지 않는다.’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 그 영혼의 황량함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동문서답이 좋다. 은혜가 된다. 안 힘드니? 하고 물으면 영성이 강해져요. 다들 잘해주셔? 하고 물으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죠. 누가 몇 시간 근무야? 하고 물었더니,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은혜의 시간이에요. 대답은 엉뚱하였으나 그 여운이 깊었다.
나는 종종 아이 안에 거하시는 주의 영이 선명하여 놀랍다. 더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는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실 때의 깊은 안도감을 어찌 표현할 길이 없다. 비록 내세울 게 없지만 그래서 더욱 감사를 더하게 하시는 것 같다.
느닷없이 감기가 와서 콧물 눈물을 줄줄 흘려내고 재채기를 연신해대면서도.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얼마나 기대되고 설레는 일인가? 그리 바라고 구하지만 여전히 나는 어림도 없는 존재여서 막연해 할 따름인데, 나다나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에서 어니스트처럼, 언제부터 우린 그처럼 ‘큰바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다. 스스로 그리 여긴 게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야곱이 각각의 분량대로 저들을 축복한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창 49:28).” 어느 훗날 우리가 주 앞에 섰을 때, 더욱 선명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겠으나,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나는 모르고 있는 동안 저들 눈에도 주께서 나를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그 축복의 손길이 선명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확신한다.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10).”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