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세기 50:20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시편 87:5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신다. 지존자가 친히 세우신다. 말씀을 입에 머금고 오래 그 의미를 음미한다. 새해가 밝았다. 일찍 일어나 앉았다. 가고 오는 날에 대하여 유난을 떨 것 없다. 이는 모두 은유다. 은유는 이것일 수 있고 저것일 수도 있다. 누구에겐 멸망하는 것이고 누구에겐 생명이다. 누구에겐 미련한 것이고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경의 언어는 은유다. 예수님은 언제나 비유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셨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같은 언어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게 은유다. 서로의 관점과 위치와 시각에서 자기 생각에 함몰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여겨지고 그리 보이고 그렇게만 인식되는 ‘본질상’ 저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은유 언어이다. 이에 지혜는 그 무엇보다 귀하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 29:14).” 국회방송에서 무슨 운영위원회를 열어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을 두고 벌이는 의원들의 질의응답을 보았다. 당과 당, 사람과 사람이 나뉘어 같은 사안을 두고 서로 다른 이야기로 공방을 벌이는 게 섬뜩하기까지 하였다.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싫고 미워서 저러는 것일까? 다들 최고의 학벌과 사회적 위신과 저마다의 훌륭함을 자랑으로 삼고 사는 위인들인데.
공교롭게도 나는 설교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고, 연신 콧물 눈물을 줄줄 흘리며 두통으로 일그러져 감기를 다스리고 있었다. 서로 혈안이 되어 있는 저마다의 가치와 기준이 두렵게 다가왔다. 뭐라 말을 섞고 이해를 더할 방법이 없어보였다. 정말 그렇다고 여겨지는 것이면 골수분자들이고, 자신들도 억지인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저러는 것이면 참으로 위선자들이었다.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해야 할 시간이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
우리의 ‘은밀한 것’을 정말 자기도 모를까? 문득 어떤 두려움마저 들었던 이유다. 아이는 전철을 반대방향으로 탔다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나는 그 카톡을 한참동안 확인하지 못하였다. 점심시간에 그래서 어찌 됐는지, 잘 출근을 했는지, 통화를 하고 위로를 하고 격려를 하였다. 나는 아이의 하루가 경이롭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사는 것이고, 그러느라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일에 대하여는 뭐라 할 말이 없다.
그 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알든 모르든, 외면하고 부정하든 이처럼 또 한 해가 저물었고 새해가 밝았듯이. 그 날,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후 1:14).”
반드시 그 날이 온다. 이를 알고 명심하며 사는 이의 삶은 무엇에도 연연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에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이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우리는 송구영신예배 대신 신년감사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늘 같은 자리 같은 모양으로 변변찮은 삶이지만 무엇에도 연연해하지 않고 그런저런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나는 주목 받고 싶지 않다. 그저 잊히고 관심 밖의 사람으로 거니는 것이 좋다. 송년회니 망년회니 다들 시끌벅적하지만 그 또한 허무하고 부질없음을 잘 안다. 그런들 속수무책인 것들에 대하여, ‘그 날’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값진 지혜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2).” 나이가 들수록 더욱 탐욕스러워지는 사람에 대하여,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이 버려두지 못하고 사는 것들에 대하여 오늘 요셉은 일갈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아직도 등에 지고 있는가? 어느 고원에 탁발승들의 도원이 있었다. 저들은 하루 두 번 줄을 지어 동네를 돌며 걸식을 하였다. 하루는 전날에 내린 비로 도랑이 불어나 저만치 한 여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러자 한 수도승이 다가가 그이를 등에 업고 물을 건네주고 돌아왔다. 모르는 척 하면서도 저들 무리에 동요가 일었다.
저녁이 되어 모든 일과를 마칠 때까지 설왕설래 여기저기서 그 일을 두고 말이 많았다. 급기야 한 사람이 다가와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자, 여인을 건네준 이가 물었다. 자네들은 ‘아직도 등에 업고 있는가?’ 어디서 읽은 내용이 적절하게 이해를 돕는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이미 요셉은 그 일을 등에서 내려놓았으나 저들 형제는 아버지 야곱의 죽음으로 더 큰 무게로 등에 지고 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그 이루심에 대하여 묵상하고 말씀을 더하는 하루였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나는 이 한 구절이 우리 인생을 이해하고 수긍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시는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한 것이다.
그 날은,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이를 확신하는 자들의 것이다. 사람들은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는 안개 같으나, 그럴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의연함을 나는 사모한다.
마음이 어지럽다가도 아이의 하루가 그 자체로 꽉 차는 것을 보면 새삼 또한 경이롭다. 온전치 못한 정신과 소근력이 약하여 부들부들 겨워하는 아귀힘으로 하루를 움켜쥐고 사는 모습이 눈물겹다. 오늘도 별 일 없었니? 일은 어땠니? 하고 물으면 하루 일과가 끝이 난다. 다들 나름의 주신 날을 살아가는 것일 텐데, 누구는 대선주자로까지 뛰던 이가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며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고, 이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면서 것도 또한 나름의 소신이고 신념이 되는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나는 일부러라도 아이 외에 아무 하고도 굳이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여기저기 동기들 단체방에서 인사를 건네고, 무슨 모임을 주선하고, 새삼 서로서로 말을 섞고 있는 그때에. 그러려니 하고 나는 묵묵히 신년 예배 때 설교 원고를 정리하였고,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히브리서 강해>를 읽었고, 국회방송을 보다 한숨을 지었으며, 따뜻한 차를 여러 잔 마시며 감기가 든 무거운 몸을 달랬다.
말씀이 있어 감사하였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읽고 묵상하기 좋은 말씀이었다. 하던 것을 멈추라는 소리다. 돌이켜 정작 해야 하는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도둑질은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는 일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 3:8).”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그리 살아왔는지.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롬 2:22).” 그런 내가 누굴 뭐라 하겠으며, 저를 정죄하는 소리가 내 귀에 도로 들리는 형국이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다른 더 좋은 방도를 나는 알지 못한다. 어디가 아픈 날, 또 여전히 혼자 있었던 날,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날, 월요일.
텅텅 빈 사무실들 덕분에 더욱 고즈넉하였던 한 날에,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8-19).” 기어이 자신이 옳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 받는 생이었다고 한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친구들의 왁자한 인사나, 거리마다 들떠 설레는 분위기나, 마지막 날 소란스런 TV 방송과도 무관하게 나는 일찍 누웠다가 단잠을 잤다. 그리고 새해 아침.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나,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시 87:5).” 이 사람 저 사람이 다들 옳다고 떠벌이는 소리에서 벗어나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시는 것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지금 이 시간 어디 저 언덕 위에서 해돋이를 보며 소원을 비는 일보다, 밤새 서로를 위로 하며 술 한 잔을 기울이며 덕담이랍시고 괜한 말을 늘어놓는 일보다, 안부를 묻고 서로 의지하며 위안을 삼는 것보다, 오직 살리라. 오늘 내게 더하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리하여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