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전봉석 2019. 1. 7. 07: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출애굽기 6:2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시편 93:1

 

 

주신 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누릴 수 있는 게 복이다. 그 묵묵함으로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전 9:7).” 이미 기쁘게 받으신 삶에 대하여 지나치게 연연해하는 모든 게 불순종이겠다. 나름 애쓰고 수고하는 게 복을 더는 일이 되겠다.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신 여호와이시다.

 

그런데 모세의 모습은 민망할 따름이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아뢰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출 6:30).” 우리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회의하고 의심한다. 우리 안에 이는 여러 생각은 저 혼자 재고 따지고 그 이치를 물어 다그친다. 이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것도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날에(28).” 우리의 의심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이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말하라(29).” 우리의 사명은 일상에서 어지럽다. 돌아서기 무섭게 현실은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달려든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 것일까? 말씀과 삶의 괴리는 좁혀질 수 없는 것일까? 이러한 갈등이 믿는 자의 씨름이겠다. 그런 우리에게 아이의 존재는 귀하다. 남들과 비교도 안 되는 금액의 월급을 받고 아이는 먼저 십일조 헌금을 가져왔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갈비를 쏘겠다고 하여 점심을 고깃집으로 갔다. 온전한 정신을 갖고 산다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한 번도 저와 같은 예의와 경우와 바른 마음을 본 적이 없다. 있음을 감사하고 그리 놓아두신 일에 만족해하는 모습이 성도의 귀한 사명인 것을 새삼 말씀으로, 실전에서 확인하는 것 같았다. 전도서에서 지혜자의 증거는 그런 게 아닐까? 그러므로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8).” 단정히 행하는 삶이란 경우에 합당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괜한 구호가 아니다. 그럴듯한 격언이나 오랜 속담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몇 배 더 벌고 훌륭하고 나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한들!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모자람이 더욱 감사히 사는 비결이었다. 이미 더하신 기쁨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회의하고 의심하고 또 되물으며 갈등하곤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그 이르시는 말씀 앞에 묵묵할 수 있는 게 순종이고 순응이었다. 다들 보면 되도 않는 자기 생각을 중심으로 맴돈다.

 

그러니 이제와 어쩌자는 것일까? 모세의 갈등은 답답할 뿐이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아뢰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출 6:30).” 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또 똑같은 고민으로 씨름하게 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겠나? 나아질 기미가 없고 오히려 더 일은 확산되어 힘에 겨울 따름이니, 어떤 다른 자구책이라도 마련해야 옳은 게 아닐까? 그래서들 미루고, 설마하고, 우선은 자기 좋을 대로 놓아두는 것일 텐데.

 

어느덧 나이가 이만큼 들고 손에 쥔 모래처럼 시간이 빠져나간 뒤에야 알겠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저의 탁월한 능력이나 여러 다양한 시도가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또 무던함으로 주신 날을 다한 것일 뿐. 아이가 먼저 돌아가고 우리는 다시 교회로 올라와서 서로 배우는 게 많았다. 즉 더하신 날에,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전 9:8).” 있는 그대로 단정히 살아가는 일에 대하여.

 

사명은 뭔가 대단한 걸 성취하고 이뤄내는 게 아니라, ‘즐겁게 살지어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9).” 돌이켜 보면 참으로 헛된 것뿐이다. 얼마나 마음을 많이도 빼앗기며 살았는지. 당장 없으면 죽을 것처럼 갖고 싶었던 욕구와 더없이 갈구하고 바라던 욕망과 내 안에 가득 고인 열등감과 수치심으로 표출되던 거짓 감정들로 인하여.

 

한데 말씀은 ‘네 몫이니라.’ 그 주신 바 더하신 이의 뜻을 온전히 구하고 바라는 삶보다 귀한 게 없다는 것을 일깨우신다. 남들과 비교하고 더 나은 나를 꿈꾸며, 이를 마치 자아실현인 듯 자기주도적인 삶을 지향하면서 살았던 날들에 대하여.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10).” 그러므로 죽음이 닥치기 전, 더는 무얼 바라고 구할 수도 없는 날이 오기 전에.

 

‘네 손이 일을 얻은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주일 날 증거하였던 말씀과 이를 뒷받침하듯 아이의 기쁜 마음이 나로 하여금 큰 교훈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 성경은 이를 ‘아내를 얻은’ 것으로 비유하신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 18:22).” 곧 우리 곁에 두신 이의 뜻이다. 이를 복으로 받을 때 은총이다. 감사할 줄 모를 데 다른 곳을 기웃거리게 돼 있다.

 

남과 비교하고 더 나은 걸 향할 때 곁에 두신 지금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단적인 현상이 이혼율증가로 이어지는 것이다. 선진화의 현상이다. 인간 중심의 사회를 모색하는 결과다.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을 때,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있는 것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일이다. 이를 ‘아내’로 표현하고 있으나 더욱 확대하면 생김과 형편과 모든 사정이 복합된 함의어다.

 

누구는 저 아이보다 훨씬 나은 직장과 더 많은 월급과 적당함 이상의 만족을 누리면서도 십일조 헌금을 아까워한다. 감사를 표현하고 예의를 다하는 데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게 다다. 저의 세상은 그만큼 좁은 것이다. 더 많고 더 넓고 더 풍요로운 것 같지만 저의 세계는 옹색할 따름이다. 늘 만족함이 없다. 그래서 이웃집 여자를 힐끔거리고 누구와 비교하여 더 나은 쪽을 취하려고 한다. 그리곤 스스로 외쳐 이르기를 요즘 이혼은 흉도 아니야! 하면서 스스로를 두둔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단지 지시적인 의미로 아내와 남편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더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 몫의 세계다. 누군 부유하고 누군 가난하며, 누군 잘생겼고 누군 못생겼고, 누군 많고 누군 적으며, 누군 여자고 누군 남자로 나뉘고 분해되어 바벨탑 아래에서 우린 뿔뿔이 흩어진 섬 같이 살아간다.

 

그럴 때 하나님이 두신 세계라. 나는 요즘 아이의 세계에서 흘러넘치는 주의 은총이 우리의 심령에까지 젖어드는 것을 느낀다. 그런 말을 잘 안 하는 아내도 아이가 돌아서 인사를 건네고 뛰어가자 마음이 좋다, 배우는 게 많다는 소릴 하였다. 괜히 좋으니 더 주고도 더 모자란 듯 마음이 간다는 소리도 했다. 이는 꼭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하지 않으실까? 주고 또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영혼에 대하여.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곧 환경을 탓할 거 없다. 여러 여건과 상황을 운운하며 모세처럼 자꾸 되물을 거 없다. 바로가 당한 열 개의 재앙은 실제 저를 벌주기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호와 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출 6:2).” 주는 누구의 무엇에 의해 권위를 더하시는 게 아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시 93:1).” 이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고,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5).” 우리 곁에 두신 ‘아내’의 존재는 내 몫의 삶이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

 

족한 줄 알고 사는 것보다 값진 지혜는 없었다. 두신 내 육신이, 가난과 이 모자람이, 때론 힘에 겨운 날들의 험난함까지도 ‘해 아래에서 내게 두신 모든 헛된 날에’ 나로 하여금 만족함을 누리게 하는 ‘사랑하는 아내’의 존재와 같은 것이었으니,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내 몫이다.’ 이에 투덜거리며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게 이 땅의 이상이라 한다면, 우리로 족한 줄 알게 하시는 게 주의 은총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일러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돌아서기 무섭게 한 살 한 살 더 먹는 세월을 곁에 두고서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여기에 두셨다. 내 곁의 아내라. 지질하고 못난 남편이라. 이와 같은 두심이 주의 섭리다.

 

그러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18).” 술 취함은 스스로 자구책을 찾는 대표적인 언사다. 만족함을 누리려는 인위적인 즐거움이다. 명품이고, 남들이 인정하는 칭찬이고, 자신이 만족하는 ‘취함’이다. 참으로 그 취하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부끄러워서 자신도 그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또 취하려고 날마다 술을 찾는 꼴이다. ‘이는 방탕한 것이니’ 그 순간에도 세월은 간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젊음을 잃는다.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막중한 사명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러려면 단정히 오늘에 더하신 날로,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전 9:8).” 무던히 오늘 이 한 날을 준행하는 삶으로의 순응이었다. 이를 오늘 본문은 이렇듯 역설한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출 6:8).” 약속을 이루실, 여호와시라.

 

곧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시 9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