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애굽기 7:22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편 94:11
자기들도 행함으로 굳이 말씀을 듣지 않는다. 그럴 것을 알고 계셨다. 우리 사람의 허무한 생각을 하나님은 아셨다. 그럼에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분명히 할 것은 ‘자기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시다.
이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우리의 허무함을 고치시고 채우시고 다스리시겠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78-79).”
다 저녁에 전화를 주어 기도를 부탁하였다. 며칠 전부터 불안이 찾아왔고 어떤 근심으로 짓눌리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결국 안정제를 복용하며 어제오늘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왜 그런지 모르겠어! 하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이성적으로는 큰 문제될 게 없는데, 그렇다고 뭐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런데 갑자기(?) 몸이 이상해!
저의 말이 오늘 아침 말씀으로 이어진다. 우리 생각의 허무함에 대하여, 본인도 스스로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하면서도 더 나은 방도를 찾아 얼마나 분주한 날을 보내었던가. 영혼의 소망이 기진하였거나 말씀으로 얻는 위로함이 고갈되었거나. 자꾸 왜 그런지에 대해 분석하지 말라고 일렀다. 갑자기 속이 얹히고 감기가 들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는 것처럼 우선은 마음의 병도 그와 같다. 그래서 ‘우린’ 저들과 달리 주를 바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게 아니겠나?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94:14).” 말씀은 엄연하여서 분명한 건,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15).”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어려움까지도 주의 긍휼하심 안에 있는 거였다. 하여 우리는 주께 부르짖는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8-19).”
다만 느닷없는 상황은 마치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처럼 우리 영혼도 건강해야 한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 말씀을 붙들지 않고 그 의미가 퇴색되는 때에 이를 알리는 종소리가 그와 같은 신호로 울려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 휴식을 취하고 친구를 찾고 어디 좋은 데 여행을 떠나 위로를 구하지만, 우리는 비로소 주의 친밀함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나는 저에게 한 번 오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기도는 늘 새로운 언어로 하는 것이고 은혜란 항상 지금 이 순간의 것으로 덧입는 것이다.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것 같지만 실제 기도란 할 때마다 다른 언어다. 은혜란 늘 똑같은 것 같지만 전혀 새로운 공기와 같다. 코를 통해 호흡하여 허파를 통과해서 나오는 우리의 언사는 그래서 감사뿐이다. 나는 잠시 ‘아이의 감사’를 알렸고, 우리는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안타까워하지만 저의 영혼이 어느 누구의 것보다 건강하고 생동감이 넘치는지! 우리는 평생에 한 번 자기 입으로 고백할까말까 하는 말을 아이는 일상 언어로 사용하고 있더라는 것에 대하여.
오늘도 별 일 없었니? 네,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다들 잘해 주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잖아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너무 힘들어서 어쩌니?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요. 이렇듯 이어지는 아이와의 대화중에 목사님은 오늘 어떠셨어요? 하고 물을 때 과연 나는, 선뜻 아이와 같이 고백하기나 했던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단다. 매순간 은혜뿐이지. 하는 말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애가 뭘 알겠어!’ 하고 말했던 저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니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게 ‘그런 아이’를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차라리 너도 맹인이었다 하면 좋았을 것을.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마 15:14).” 답답한 노릇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17).” 무심히 쏟아내는 말 속에 자기 영혼의 상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20).” 그런 걸 그저 어떤 현상이나 행위로만 취급하려고 들면!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몸이 이상해요. 하는 저의 하소연에 나는 달리 전화로 토를 달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저도 안다. 알면서 스스로 외면하는 것에 대하여는 그러는 동안 볶이고 쓸려 한바탕 요동을 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러면서 자꾸 내가 아이로 인해 받는 은혜를 소개하고 싶은데 저는 자기 이야기와 당장의 그 증상으로만 앓는 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분명한 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추구하고 저들처럼 행복을 도모하는 일에서 오히려 허무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더 큰 낭패라.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가 성경을 가장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은, 두루두루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아는 것.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
그래서 가난하고 낮고 천한 자리에까지 오셨다고 아는 것. 그래서 우리도 두루두루 사랑해야 된다고 아는 것.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두의 형제가 아니시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특정하여 저만의 하나님이신 것을 엄연히 알아야 한다. 곧 ‘믿는 자들’에 대한 분명한 차별과 차등은 확실하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이 거룩이란 엄연히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다 한 근원으로 놓고 위하시는 그 대상이 다른 것이니,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우리가 자칫 오해로 출발하여 모든 인류의 하나님으로 보편화시킨 대상은 스스로를 일반화시킴으로 딱히 구별하여 부르신 데 따른 목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는 목적이 저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님이 들어가고 믿음을 운운하며 선을 도모하는 것 같지만, 그게 다 허무할 뿐이라. 저들이 쓰는 하느님이나 천지신명이나 희귀한 존재와 다를 바 없다면! 보편화시킨 사랑은 내 것과 같지만 내 것이 될 수 없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 말씀 하나로 우리의 모든 난제는 풀린다. 곧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어떤 어려움도, 죽을 것 같은 두려움도, 죽음까지도! 주의 것이다.
우리는 구별된 상속자이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고로 요즘 나는 아이의 일상이 큰 교훈이라. 저가 무심히 내뱉는 말과 말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어찌 함께 하시는가를 살펴서 그 뜻을 헤아린다. 이를 누구는 병적이라 진단하고, 아픈 아이로 낙인찍고, 저가 뭘 알까 의심하지만. 차라리 그러는 저도 안 보인다고 하며 눈을 뜨길 바랐으면 좋았을 걸.
자신은 본다고 하니 그 보는 것이 허무함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두려운 말씀이다. 우리는 저 아이보다 정상이라고 여기니 그저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나 할 뿐인데, 정작 누구라도 남들 앞에서 저 아이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찬양하고 높이었던 적이 있었나? 요즘은 온통 찬양도 말씀도 심지어 성전의 이런저런 분위기까지도 희석시켜, 요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덜하게 하려고 한다는데! 이야말로 난센스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를 가장 선명하게 느끼고 누리고 말과 말 가운데 증거하는 아이의 ‘엉뚱한 대답’을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다 저녁에 누구와의 통화. 높은 학식과 좋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에 허무함뿐이라.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시 94:8-10).” 고로 우리는 주 앞에 의뢰할 따름이라.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11).” 저들도 행할 수 있는 일을 보고 더욱 마음이 완악해지는 터에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14).”
그러므로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