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기 14:14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편 101:1
늘 말버릇처럼 쉽지 않다, 쉽지 않다 그런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이를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고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데 열을 올리고 그렇듯 열심을 다해 사는 걸 보면, 실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싫어서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안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놓고는 어렵다, 쉽지 않다, 거슬러 말씀 아닌 다른 데 열중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는 사람을 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저마다 그러는 누구, 어떤 이를 보고 저처럼 따라하려고 한다. 누가 그러는데, 다들, 어떤 이가, 하는 식으로 동조하고 무언가 보이는 것에 연연해하는 것이다. 은연중에 저가 나온 대학, 어느 분야에서의 으뜸인 성과, 그것을 중심으로 모여 선 사람들, 그 무리 가운데 소속돼 있다는 자부심. 그것이 주는 안정감을 선호한다.
그러한 우리의 취향에 비춰볼 때 오늘 말씀은 다소 의외다. 가만히 있으라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이뿐인가? 성경은 일관되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그래서 보면 가장 쉬운 것 같은데 제일 어려운 게 은혜다.
거주 주시는 바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이를 못 견뎌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행 19:36).” 그러기 쉽지 않다, 하면서 뭔가 하려고 하면 우리는 그 열심으로 지친다. 성경을 하루에 수십 장씩 읽고 일 년에 몇 번을 통독하고, 작정 새벽기도를 시작하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그 안에 평안이 없고 어떤 만족함이 없는 까닭은!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어떤 가시적인 성과 또는 그에 따른 결과를 놓고 씨름하는 동안은 어림없는 것이다. 보면 다들 목사들도 저마다의 지향하는 바가 다른 것 같다. 누군 어느 분야에서든 그 일에 최고가 되길 강조한다. 맡기신 데 충성을 다할 때 최고가 될 수밖에 없고 최고가 되어야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나는 저의 논리에 아찔하였다. 또 누구는 알아서 하시겠지! 내가 이만큼 준비하고 그렇게 마음을 두고 바랐으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셔야지, 하였다.
뭐라 한들 들릴 리 없는 소리여서 나는 내 안의 불편함을 감추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들 가르치고 간직하고 목회를 감행하고 있는 것인지. 각자 가진 성향이나 기질이 다르니 그렇듯 하나님이 유별난 것을 들어 쓰시겠거니, 그리 생각하기로 하였다. 오히려 나는 오늘 말씀에서 힘을 얻는다. ‘가만히 있으라.’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46:10).” 그저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본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너무 당당하게, 하나님이 하신다고 외치는 이에게 내가 드는 위태로움은 불신앙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분야에서든 최고가 되라고 말하는 이의 주장에 반감이 드는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소극적인 사람이라. 딱 그만큼, 할 수 있는 정도에서 족하였다. 두 달란트 받았으면 두 달란트로 하면 된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으면 다섯 달란트로 하면 될 일이고. 서로에게 맡기신 게 다를 테니 그럴 거였다. 성경의 마지막 언급은 그래서 더욱 심오하였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따라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나름 열심을 다하는 이에게는 사실 복음이 그처럼 간절할 리 없다. 스스로 확신하여 결의가 대단한 사람을 보면 내가 먼저 주눅이 드는 이유였다.
그저 다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혹시 이게 뒤바뀌면 어떨까? 가장 악한 것은 하나님을 내 뒤에 세우는 일이었다. 아예 모른다 하면 그 입에서 하나님을 운운하는 죄를 짓지는 않을 텐데. 열심을 다해 이웃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앞서는 일은 난감하다.
이를 악하다 하기도 뭐하고 선하다 하기도 뭐하고. 자기만족에 겨운 열심보다 위험한 게 또 있을까? 나는 거의 병적으로 소극적인 사람이라,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하는 말씀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무얼 얼마다 대단히 확신을 가지고 열심을 다해 어떤 성과로 최고로 으뜸이 된들 주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송구할 따름이라. 모든 게 은총이었다. 내가 나를 불사르게 내어준들, 그래봐야 소용없는 것이었으니,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01:1).” 우리가 할 일은 주를 찬양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주도하고 어떤 데서 위로를 더하는 방식이 아니다. 모 교회는 교인 수가 적은 것을 두고 자부하는데 일당백이라는 식이다. 내로라하는 학벌과 다들 최고 지위의 사람들로 모였으니, 차라리 학교도 그리 대안학교로 세우고 자녀들도 그리 양육한다.
교회 정원을 몇 명 이상 늘리지 않는다는 데 자부하고, 몇 명의 정예부대처럼 나름의 으뜸으로 족한 것이어서.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이보다 어처구니없는 비성경적인 태도가 또 있겠나 싶을 정도로 엘리트주의가 팽배하다. 아니라고 하지만 은근히 담임목사가 어느 대학을 나왔고 그 구성원이 다들 어떠어떠한지 자부심이 대단한 것이다. 그것으로 소문이 나서 단시일에 소수 정예 교회를 이루었으니,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생각해도, 바울과 그를 따르는 무리를 찾아봐도, 어찌 적용을 해야 하는지. 오히려 바울은 스스로의 잘난 점이 거치는 돌이 될까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기 원하고 심지어 배설물로 여기는 일에서, ‘오직’,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바라는 것인데! 오전에 나는 여섯 명의 사람에게 줄 연말정산 기부금 영수증을 만들었다. 얼마씩 그 적은 금액들이 모여 이 보잘것없는 교회를 이루고 지탱하는 것이었으니, 누구와 견주고 어떤 교회와 비교가 될까싶다가도, 넉넉하였다. 늘 보면 내가 제일 부자이다. 넘치게 부어주심을 누린다.
고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어제 하루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나를 붙드셨다. 어느 교회가 어떻던, 누가 어떤 목회를 지향하든, 그래서 어떤 성과를 내고 얼마큼의 부흥을 이뤘다는 이야기 앞에서 기죽어 있다가도 우리로서는 충분하였다.
한 영혼으로 족한 수준이라. 나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도 주를 바람으로 귀한 것이었으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사는 날 동안 세상의 이런저런 모양으로 드러나고 평가받고 그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것이겠으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 내게 두신 자부심이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여 주 앞에 더욱 부복하는 일,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주님은 날 위해 기도하신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16).” 우리로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러한데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은근히 저들을 부러워하고 그래서 나는 주눅 들고, 어떤 부끄러움에 미천할 뿐이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그래서 감사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날마다 나와의 전투가 가장 치열한 것이어서 말이다. 나는 나의 확신을 확신하지 않는다. 우리 교회가 뭔가 대단히 무얼 해야 한다고 꿈을 갖지 않는다. 족한 것이다. 비록 늘 쪼들리는 살림이나, 겨우 여섯 통의 기부금영수증을 만들면서도 무엇보다 감사할 수 있었다.
이에 다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게 하심이다. 이에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내게 두시는 마음이 그러하지 않을까? 고로 저들을 헤아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것으로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고로 하나님을 본다. 고로 하나님만 본다. 오늘 말씀은 이를 견고히 하신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그러므로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0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