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전봉석 2019. 1. 18. 07:1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출애굽기 17:8, 15-16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104:33

 

 

‘그 때에.’ 우리의 원망과 불만이 가득하던 때에,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출 17:2).” 어찌 그리 틈만 나면 다투어 주를 원망하곤 하는지. 그 때에 아말렉이 쳐들어와 싸움이 터졌다. 것도 ‘여호와 닛시’ 주께서 싸우셨다.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빈번하게 드러나곤 하는지. 금세 또 불안과 초조는 원망과 후회로 이어져 남 탓을 하기 일쑤인데, ‘그 때에’ 우리의 어려운 고초 가운데서 하나님이 싸우신다. 그 싸움의 승패는 ‘모세의 팔’에 달렸다. 곧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11).” 곁에서 아론과 훌이 이를 붙든다.

 

오늘 우리 곁에 두신 모든 게 합당한 것은 저들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어린아이와 같이’ 행할 것인지. ‘완전하고 성숙한 데로 나아갈지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같은 이야기를 맴돌 듯 또 같은 일로 싸움이 벌어지곤 하는 일상의 전장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3).” 더러는 확신을 잃고 또는 불행을 자초하여서 그릇 행하기 일쑤인데,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5:12).”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내 안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초보적인 의문이 들곤 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내 곁에 붙이시는가.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13-14).” 늘 아닌 척 괜찮은 척 굴던 중딩 아이가 뜻하지 않게 자기 이야기로 글을 길게 썼다. 잠언을 읽고 어찌 그와 같은 자기 이야기를 이끌어냈는지, 이혼모 밑에서 자라는 애환이 고스란히 진술되어 있었다.

 

적절하게 초딩 아이들이 돌아가고 같이 하는 중1 아이와 중3 아이도 사정이 생겨 먼저 가거나 오지 않았고, 나는 아이의 속엣 얘길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과 어른 남자들을 경계하는 심리와 한 친구에게 집착하는 소유욕을 보였다. 어쩌겠나? 우선은 인정하고 받아들임에 대하여 알려주고 싶은데, 그 나이 때는 어쩜 그리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인지. 어쩌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초딩 6학년 때 여자 아이들 반에 장애가 있는 남자 아이들 넷이 들어가 한 반에서 1년간 수업을 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서 벌여야 했던 사투와 사소한 원망이 쌓여 중무장을 하고 살았던 것에 대하여, 나는 아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한 장애아동이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가 발생했고 궁여지책으로 교육부에서는 모든 장애아동을 1층 교실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우리 6학년은 남녀 분반이었고, 1층에는 여자 반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벌여야 했던 1년의 시간이 새삼 아련하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한데, 그땐 그게 그렇게 서글프고 고단했던 것 같다. 아이는 반에서 ‘아버지’라는 주제로 발표를 해야 할 때 한 시간 내내 자신이 지목될까봐 벌벌 떨었고, 이내 수업이 끝난 뒤 자신도 주체할 수 없게 눈물이 펑펑 흘러내렸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두 앞에서는 마치 단란한 가정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듯 굴 수 있으나, 그 속은 어떠한지. 아이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까지 무려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여, 그럼에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수긍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하여, 그래서 나는 그 나이 때 내게도 있었음직한 고독한 싸움을 들려주게 되었는가보다. 나는 이쯤 나이 들어서 더는 무얼 욕심내지 않고 바라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쩌겠나? 그러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고, 그러는 동안에는 싸움이 늘 끊이지 않는 것이었으니.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다. 우리는 결국 지각을 사용하여 이를 분별하고 판단하여 연단을 받음으로 선악을 안다(히 5:11-14). 그런데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두렵고도 무서운 말씀이다. 지식이 없으면 기준이 모호해진다.

 

기준이 없으니 그때마다 즉흥적이다. 감정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판단이 서지 않아 갈팡질팡하다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 일쑤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어쩌면 오늘 본문은 여실히 그럴 수밖에 없는 저들의 영적 수준을 보여주신다. 돌아서기 무섭게 또 금세 원망이 터져 나오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가 싸우신다는 사실. 여호와 닛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하는 삶을 맛보아 알게 하신다. 그리하여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때에도 이제 우린 주의 이름을 부를 줄 아는 것이다. 중딩 아이와 짧고 긴 이야기를 나누고, 일찍 끝난 아내와 함께 여권을 갱신하러 갔다. 다음 달 아들 대학 졸업식에 간다는 데 은근히 들떠 있었다.

 

모처럼 나간 길에 대형 쇼핑몰을 구경하고 딸애 퇴근 시간에 맞춰 데려올 생각이었다. 휘적휘적 걷는 걸음이었는데 힘에 부쳤고 허리가 아파서 나는 자주 어디에 앉아야 했다.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를 사고 왁자한 식당가에서 이를 부려 식사를 하려는데 훅, 하고 어떤 불안이 엄습했다. 내 안에 이는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요 앞에 나는 번번이 속수무책이다. 얼른 안정제를 삼켰는데도 가시지 않고 오히려 다리가 저리고 시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서둘러 귀가를 하고 나는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몸도 영혼도 고루한 사람이라, 민망하면서도 송구하였다. 주님, 하고 돌아누우려는데 눈물이 와락, 솟구쳤다. 중딩 아이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위해 들려주었던 내 이야기와 그렇듯 우리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서러움과 한탄과 애잔함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그러느라 늘 퇴근하고 근황을 살피고 묻던 ‘아픈 아이’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 문자가 오고 전화를 했었는데도 말이다. 다 늦게 답을 하고 위로를 하다 핑, 도는 어떤 안타까움이….

 

주가 돌보시지 않으면 단 하루도 매순간도 살 수 없음을 여실히 느낀다. 느끼면 느낄수록 저 혼자 씨름하고 다투며 고단하게 견디고 서있는 아이들의 고단함이 눈물겹다. 진짜 아빠를 같이 사는 아저씨 몰래 만났던 이야기. 형이 군대 간 이야기를 하다 다른 아이들 몰래 ‘선생님만 보세요.’ 하고 적어놓은 아이의 글이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괜찮은 척 태연하게 살려고 하면할수록 힘에 겨운 아이들의 수고가 중첩되어 나를 종종 힘들게 한다.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그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나에게 들려주고 그것으로 위로를 삼는 아이들에게 나는 대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중딩 우리 여자 아이의 그런저런 사연을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먼저 말할 수 없는 일이어서. 실은 마음을 열고 이처럼 다가오기까지 거반 1년은 족히 더 된 것 같다. 뜬금없이 유도를 배운다며 중딩 가운데 여자가 저 혼자라는 소리에 차라리 태권도나 검도, 복싱을 하지 그러냐는 내 말에 의아했다.

 

아무래도 유도나 레슬링은 신체 접촉이 많은 운동이라, 우려 섞인 잔소리를 하자 아이는 불쑥, 아빠 같아! 하고 말해놓고는 민망했던지 피식, 웃는 것이다. 서러움인지 서글픔인지 감추지 못하고 드러나는 아이의 어색한 표정 때문에 나는 또 슬펐다. 도무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나는 다만 주의 이름을 되뇔 뿐이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시 104:33).” 이를 어떻게 하면 아이도 알게 할 수 있을까?

 

‘그 때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였다. ‘여호와가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주님,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시 104:34).” 숱하게 되뇌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일. 종잡을 수 없는 나의 컨디션과 내 곁에 두시는 아이들의 아픈 사연과 현실을 두고 내가 대체 할 수 있는 일이란,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주밖에 나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그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10-12).” 그러므로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13).” 죽을 것처럼 불안에 겨워하다 이불 속에 누운 나를 두고 아내는 풋, 하고 웃으며 이불 속이 가장 안전해? 하고 놀렸다.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16).” 내가 주를 바라는 한 가지, 두신 데 따른 여러 환경과 요소를 온전히 주의 뜻 가운데서 알고 이해하고 주께 바라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시기를.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17).” 아이들이 속엣 얘길 들려줄 수 있는, 넉넉한 주의 품으로 삼으시려고,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18).” 오늘 내게 두시는 것은 물론 예전에 두셨던 이 모든 것들이 합당하였다.

 

나중에,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까? 넌 그만큼 넉넉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내가 중딩 아이에게 들려주었던 말처럼,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