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출애굽기 18:17-18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시편 105:3-4
좀 더디더라도, 능률적이지 못하고 효율성이 좀 떨어진다 해도 그냥 그렇게 모세가 혼자 그 일을 감당하였으면 어땠을까?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며 이를 백성과 공유하면서. 그런데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생각대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란 제도가 생겨나면서 사람은 서열로 나뉘고 그 세도에 따라 권한이 부여된 것이었으니.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 7:29).” 그런 게 아닐까?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잠 1:31).” 물론 저의 판단은 매우 합리적이었으며 그 효과는 능률적이었고 그것으로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관할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나누고 나뉘어 통치와 다스림이 이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는데,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히려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 31:20).” 보면 너무 잘 돌아가는 게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젠 느림과 익숙하지 못함을 선호하는 삶도 생겨난 게 아닐까? 굳이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세분하여 원활하게 인생을 바삐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늘 그 이상의 이상을 꿈꾸면서도 실제 삶은 틀에 박힌 세세한 몸짓으로 여념이 없는 게 되었다.
모르겠다. 새삼 나는 저의 지혜가 꾀로 여겨진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할 정도였으면 하나님이 그걸 개선하실 생각은 못하신 걸까? 그래서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그 일을 모세가 혼자 도맡아 짊어진 것부터 기력이 쇠할 정도의 중함이었다면 말이다(출 18:17-18). 물론 사람은 그 지혜를 발휘하여 더 나은 삶을 추구할 권리도 있겠지만, 이는 양면의 거울 같다.
동시에 양쪽의 거울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문득 오늘 본문은 그래서 우리의 ‘바쁘다 바빠’로 아우성치게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한다. 그냥 둬도 될 문제들이 의외로 거론되고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 애쓰고 수고하며 그런 가운데서 의미를 찾는 것 같다. 내 짧은 소견으로는 소위 말하는 취미와 오락이 그 대표적인 왜곡이 아닐까? ‘어른아이’가 늘어 성인이 되어서도 조립인형에 정신이 팔려 있거나, 게임 시장이 날로 번창하는 까닭도 그에 따른 반대급부가 아닐까?
우리는 다만,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3-4).” 무엇을 구할지 그 대상은 분명한 것인데, 우리는 점점 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정작 우리가 잃어버린 중요성은 무얼까?
그러니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게 여가(餘暇)가 되었다. 쉴 줄 모른다. 누구의 지시가 없으면 금세 흩뜨려지고 해이해진다. 혼자 무얼 추진하기가 어렵다. 동조하는 세력이 필요하고, 어느 그룹에 속해야 안도한다. 군중심리가 죄의식조차 뭉개버린다. '그럴 수 있지, 다들 그런데' 하는 소속감이 우리로 안이하게 한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능률적이라 생각하는 것에서 정작 우리의 나태함은 싹을 틔운다. 굳이 안 해도 될 것들이 오히려 그 틈을 메운다. 수동적인 삶이 되었다.
이를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일깨운다. 우리의 자랑은 제도가 아니다. 탄탄한 구조도 아니다. 효율적인 생산성도 아니다. 그로 인해 우리 본연의 자세를 잃었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스스로들 세우고 만든 것에 여념이 없어, 그런 우리에게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곧 우리의 잃어버린 즐거움을 일깨우는 것이다. 저마다 취미와 오락을 삶의 즐거움으로 추구하는 세상에서,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그래야 하는데 일개 한 사람은 십부장을 꿈꾸고, 십부장이면 오십부장 백부장을 꿈꾸면서, 진급을 성장으로 삼는다(시 105:3-4).
그런데 거룩은 우리의 모든 걸 다 걸고 바라야 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이를 안이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래도 되고 아니면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29).” 정작 우리의 문제는 게으른 게 아니라, 너무 바쁜 게 변이 되어 게으름을 조장하는 것이다.
아이들도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없고, 바빠서 일기를 쓸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너무 스케줄이 꽉 차 있다. 무슨 학원 끝나면 또 무슨 학원으로 이어지면서, 실제 넘쳐나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여유는 퇴화되었다. 시간이 없다 하면서도 게임은 한다. 유튜브는 본다. 그것으로 쉬는 것이라 여긴다. 재미와 오락이 우리를 더욱 정신없이 만들어버렸다. 그러다 잃어버린 게 거룩은 아닐까? 우리의 경건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우리의 세계는 날마다 흔들린다. 날로 진화하는 게임시장 같다. 내남없이 ‘개인 TV’ 시대다. 일이 더 많은 일을 낳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죄에 대해 자각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6:6).” 이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5).” 이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 원리는 간단하였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7-8).” 과연 우리의 오늘은 무엇을 내었나? 채소인가 엉겅퀴인가?
잠이 일찍 깼다. 뒤척거리다 일어나 앉아 습관을 좇아 말씀을 묵상한다. 며칠째 어떤 우울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혹시나 했던 아이가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다음부터일까? 아니면 아무리 공들여도 그저 흩어져 날아가는 연기 같은 아이들 때문일까? 아니면 아내와 딸애가 다음 달에 아들애 졸업식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나만 소외된 것 같아서일까? 어제는 또 이번 주일 설교 원고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어서 혼자 있는 하루가 너무 길고 무료하였다.
어쩌면 더디 읽고 있는 <숨결이 바람 될 때> 때문인지도 모른다(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점에서 나는 저의 고통이 두렵다. 죽어가면서 남긴 저의 생생한 암 투병 이야기가 괴롭다. 나는 늘 아픈 게 무섭다. 자꾸 이런 걸 읽으니까 그렇지! 하면서 딸애가 괜히 참견을 할 정도였다. 그러다 오늘 아침 말씀은 '우리의 잃어버린 거룩의 자리'가 우울감인 것을 알게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곧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그렇게 우리가 본연의 거룩을 잃어버린 게 오히려 더 바빠지게 된 천부장, 백부장, 하는 세분화된 삶이 그 원인은 아니었을까? 더는 거룩한 땅을 지향하지 않고, 그러한 자각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거룩한 성회가 사라졌다. “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가 되리니 너희는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자의 먹을 것만 갖출 것이니라(12:16).” 안식일이 애매해진 것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16:23).” 이 모든 게 거룩이 퇴색되면서 빚어지는 일이다. 바쁘게 치닫는 생활 때문에 말이다.
거룩한 옷,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28:2).”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느 11:2).” 거룩한 말씀과 기억,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 105:42).” 그 입맞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그리고 믿음,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점점 더 잃어가는 거룩이 많은 것 같다.
원래 하루는 길고 일 년은 짧은 법이다. 일 년은 먼데 십 년은 후딱 간다. 돌아보면 어느새 이만큼이지 않나! 혼자는 바쁜 것 같아 여럿을 세웠더니, 오히려 더 분화된 시간은 바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한 것도 없으면서 누구와 통화해야 할 약속도 잊었다. 바빠서 기도할 겨를도 없었다. 말씀 묵상은커녕 그리 유유자적할 시간이 없다. 들어보면 그저 분주할 따름이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시편의 말씀은 잃어버린 거룩을 회복시킨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시 105:2).”
곧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1).” 왜냐하면 그는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3-4).” 그러므로 정작 우리의 일은 무엇인가? 그냥 각처에서 아귀다툼의 시간을 멈추고, 잊고 있던 거룩한 손을 들라.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