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누가 능히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전봉석 2019. 1. 20. 06:0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출애굽기 19:12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시편 106:2

 

 

하루는 말씀이 물었다.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냐? 그 앞에서 구도자는 그 손에 들린 지팡이를 보고, 지팡이이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말씀은 지팡이로 구도자의 머리를 때렸다. 구도자는 머리를 쥐고 다시 살폈으나 여전히 지팡이였다. 말씀은 그것이 지팡이다 아니다 말해주지 않았다. 정작 구도자의 머리를 때린 것은 구도자였다.

 

우리가 주 앞에 나온다는 것은 그의 말씀으로 머리를 한 대 쥐어 맞는 일이다.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시는 것 같다. 정작 나를 때리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시를 읽을 때면 종종 얻어맞는 기분처럼 말이다. 시어(詩語)는 본래 이해나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맞는 것이다. 맞이하는 언어이고 받아들이는 말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다는 건 그저 가만히 침묵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럼 말(言)들은 말없이 확장된다. 돌아보면 내 안에 말들이 어느새 가득 찼다.

 

무슨 말이냐? 우린 침묵을 배운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출 19:12).” 오늘 말씀은 그 경계가 엄중함을 일깨우신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시 106:2).” 아둔한 입술로 표현되는 것이 불경하고 묘사되는 것이 불온할 뿐이다. 그저 받아들임으로 침묵은 더 많은 말들로 자유로워진다.

 

이를 보는 자가 말한다. 말하는 자는 침묵한다. ‘더 이상 갈 수 없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것이다.’ 경구처럼 마음을 울리는 문장 하나 때문에 사뮈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를 샀다. 책장을 넘기기 전 나는 먼저 숨을 고르고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책값이 너무 비싸다. 아껴 읽을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거듭 읽고 되새겨 듣는 일이기도 하다. 말씀 앞에서 우린 얼마나 그 엄청난 값어치에 놀라곤 하는지. 머리를 한 대 맞는 것 같다. 내가 쥔 것이 무엇이냐?  다시 물으시는 것 같다.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시 106:24-25).” 거듭되는 우리의 불신앙이 귀를 아둔하게 한다. 눈이 멀어 앞을 분간하지 못한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눅 19:38-39).” 바리새인은 자신들만 모른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40).” 동문서답 같다. 무슨 의미인지 알 길이 없다. 다들 자기 언어에 도취된 까닭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 18:38).” 저는 물었고, 저는 대답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였다. 예수님은 침묵하셨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사람에게 성경의 언어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37).” 저는 진리를 알 길이 없다. 눈앞에 두고도 볼 수가 없다. 그 음성을 듣고도 들리지가 않는다. 침묵은 확장된 언어이다.

 

사람들은 아우성친다. 진리가 무엇이냐? 열심을 다한 자신의 평생이 그의 머리를 친다. 자식 하나만 보고 자신의 꿈을 접은 부모들은 곧 후회가 저의 머리를 갈긴다. 수고를 아끼지 않고 살았던 자신의 인생이 자신을 후려친다. 돌들의 침묵이 우렛소리 같이 크게 울린다. 아이가 퇴근하고 왔다. 저와의 선문답이 늘 새롭다. 빵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 손에 빵이 들렸다. 날 주려고 들고 온 것이다. 우리는 토요일 조금 늦은 점심으로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같이 시편을 읽었다. 오늘은 어땠는지, 한 주간은 괜찮았는지, 하는 일은 어떤지, 사람들은 좋은지. 늘 바보 같은 나의 질문에 아이의 대답은 투명한 봉지 같다. 감사하죠. 오늘도 기도했어요. 어떻게 하면 기도를 더 들어주실까요? 그야말로 우문현답이라. 그 속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감사한다. 진리는 침묵하게 한다. 진리는 침묵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우리는 하루에도 수골백번 묻고 또 묻지만, 하나님은 짙은 노을에 서명하지 않으신다. 바람은 길을 잃는 법이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게 하시는, 도구이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암 5:21).” 우리의 아우성이 정작 귀를 막게 한다.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열심이 얼마나 흔한지 모르겠다. 내가 대체 이런 애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에도,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 그저 나는 땅속에 묻힌 관처럼 또는 몸속의 혈관처럼 흘려보낼 뿐이다.

 

진리는 다만 진리이다. 내가 말하고 진술할 수 없다. 그저 소식을 전할 뿐이다. 한 편의 시어처럼 놓이고 보일 것뿐이다. 성경의 언어는 그와 같다. 모든 선지자들이 그리 외쳤다. 사람들이 따르며 호산나, 호산나 외쳤다. 우리가 멈추면 길가의 돌들이 아우성칠 것이다. 다만 들려줄 뿐이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 40:28-31).

 

그 시대마다 저들은 개별적이었고 한계가 있었으며 그저 보이고 들리는 것을 전하였을 뿐이다. 때론 저들도 자신들이 하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 주는 끝내 이끄시고 돌보신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9).”

 

말씀 앞에서 멈칫, 나는 침묵을 배운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데 토요일 오전은 넉넉하였다. 한결 넓어진 공간 같다. 피곤에 절어 힘들어하면서도 아이는 즐겁게 왔다. 병원에는 들렀니? 약을 탔니? 개수는 줄었니? 좀 나아졌다고 하니? 이어지는 나의 말에 아이는 공손할 뿐이다.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사 65:23).”

 

우리가 무엇을 해야 주가 들으실까?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24-25).” 이사야는 자신이 전하는 말의 의미를 다 알기는 한 것일까? 종종 알 수 없는 말씀 앞에서도 저들은 다만 전하였고 흘려보냈다.

 

심지어 절망이 극에 달하였을 때도,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7).” 그럼에도 묵묵함이 침묵을 듣는 귀였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9).” 어쩌면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연신 머리를 쥐어 맞는다. 정작 나를 때리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냐? 말씀은 묻는데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하면 내 속에 불붙는 것처럼 견딜 수가 없다. 아이와 기도하고, 말씀 보고, 같이 식사를 하면서, 나는 다만 들려지는 소리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아이가 제일 정신이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그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아이들 중에 저만치 주를 바라고 의뢰하며 섬기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다들 본다고 하니 더는 보일 게 없는 것이 진리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나는 이 말씀을 늘 아이에게서 듣는다. 돌들의 외침이 우렛소리 같다. 진리는 말할 수 없고 복음은 보일 수 없다. 그저 나는 가리킬 뿐이다. 구약의 그 암울했던 시기에 아모스도 호세아도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정작 저들도 자신들이 전하는 말씀의 진리를 다 알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비밀이 고스란히 성경의 언어로 시어처럼 진술되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1-5).

 

밤새 엄마의 기침소리로 깜짝깜짝 놀라 일찍 일어나 앉았다. 늙으신 부모의 모습은 여러 말보다 더 많은 교훈을 침묵한다. 한 달에 한 번 인천까지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시는 일도 이제 버거우신 모양이다. 하루 전날에 와서 쉬었다 주일을 맞는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6:1).” 한 구절의 말씀 앞에서 목이 멘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2).”

 

부모의 늙음은 어떤 웅변보다 많은 말을 내포한다. 아직 하지 않은 질문의 답이고, 오지 않은 미래의 모습이다. 아직 묻지 못한 질문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진리가 무엇이냐? 수많은 빌라도가 날마다 묻는다. 묻고는 답을 듣지 않을 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나에게 늙으신 부모의 모습은 함축적인 언어다.

 

내가,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시 106:24-25).” 그러는 동안에도 저들은 살면서 살아서,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3).” 말씀으로 들려지고 그리 행하여 복이 되었다. 진리가 무엇이냐?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진리로 살며,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4-5).

 

아이를 보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찬송은 사는 것이고 찬송으로 사는 일이지 입으로만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47).” 우리가 하지 않으면 돌들이 외칠 것이다. 내가 나의 머리통을 후려칠 때 비로소 나는 주의 손에 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말씀의 언어는 아득한 아우성이다. 침묵하는 돌들의 웅변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