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출애굽기 22:31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시편 109:30-31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세상이 그렇다. 다들 궁여지책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는 기도뿐이라. 어떻게 대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참으로 악하다. 아,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우리는 이 비밀을 맡은 자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4:1).” 일구어 이룩한 게 아니라, 받은 바를 전하는 것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15:3).” 그것으로 ‘합당하게 이루신 모든 의’의 의를 이루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서로 속이고, 이득을 남기기 위해 꾀를 내고, 거짓을 꾸며 살아야 하는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은 세심히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다. 남의 것을 취하는 데 있어 저에게 해를 끼쳤다면 어찌해야 하는지, 이는 처벌의 문제가 아니라 그처럼 신중하고 또 자중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이어지는 오늘 말씀과 그 모든 율법을 이루시기 위하여, 굳게 결심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하나님도 어쩔 수 없으셨다는 데 마음이 숙연해진다.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리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악한 세상을 두고 자꾸 악하다고 한탄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나님도 다른 방법이 없으셨으므로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신 것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그 구원의 길이 선명해진다. 사람들이 왜 그럴까, 이해가 된다. 지나치게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본디 죄란 그런 것이다. 저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게 또한 세상이다. 감추고 속이지 않고는 나름 그 행복을 유지할 방도가 없는 곳이다.
이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말씀을 먹고 말씀으로 사는 삶이란 그가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길이었다.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죄와 상관없으시면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재림 예수시라.
이래저래 마음이 어렵고 속이 상하다가도 그렇기에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바 그의 사랑의 대상이 또한 이 세상이 아니겠나? 저들도 저들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그의 악함이 당연하다는 듯 그렇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 땅에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 3:13).” 한참 저들을 욕하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안 된 것이다. 또 누군가의 남편으로 아내로, 아버지로 어머니로 살아가고 있을 텐데.
개처럼 벌어야 사는 세상에서,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14).”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자. ‘공매 차량’이 어떻고, 그래서 그걸 얼마까지 준다느니 할 때 벌써 이상하기는 했다. 동생이 차를 구입하려고 중고 시장을 찾았다가 이래저래 저들의 상술에 혀를 내두르는 사건이 있었다. 세상에 눈 먼 돈은 없다. 기준보다 싸다면 그게 다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공짜는 없다. 괜한 친절은 본래 불가능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모든 게 거짓되었다.
허탈하기도 하고 욕지기가 올라오다가도, 그러니까 또한 세상이지 싶었다. 남보다 의롭고, 유난히 선을 행하며, 늘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이란 본래 없다. 그리 여겨주고 기념하여 서로 추켜세우며, 정작 불가능한 것을 바라며 그 이상을 꾸며내는 것이지, 어떠하든 악하다. 그 정도로 가망이 있고 희망을 품어도 되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시기까지’ 할 것도 아니었다.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세상 앞에서 나는 낙담한다. 설마, 했던 게 역시나 실망으로 돌아왔다. 어김없이 알게 되는 일, 결코 우리는 선할 수 없다는 데 회의한다. 아니,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내가 너무 부정적인 사람이라 의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부터도 순수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저간에 깔린 의도는 본인조차 알 수 없는 일이다.
모 의원이 낙후된 어느 지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그곳 땅을 인친척과 지인들에게 사들이게 하고, 그곳을 문화재청으로부터 특별한 지정거리로 삼으려 했다는데. 본인은 얼마나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 순수한 의도로 그리했는지 모르겠으나, 그저 사악할 뿐이다. 앞뒤 말이 안 맞는다. 자신만 억울하다고 호소한다. 정작 자신까지 속여 대는 판국에 자신도 자신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들 으르렁거리며 자신이 옳다 우겨대는데, ‘아직 끝이 아니니라.’
말 나온 김에 돼도 않는 나의 감정 하나는, 종종 아이들이 또 내가 살아야 했던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인다. 아등바등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마음은 상하고 그 영혼은 상처를 입으면서, 때론 굽실거리며 궁여지책으로 자신까지 속이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서. 한 아이와 종종 길에서 마주친다. 이제 초등학교 5, 6학년쯤 됐을까? 늘 어두운 표정에 눈을 내리깔고 웃음기 없는 낯빛으로 스쳐지나갈 때마다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또한 얼마 생을 남겨두지 않은 노모들이 찔뚝거리고 기우뚱거리면서 죽자고 들락거리는 같은 층의 모 의료기 체험기기 판매소를 오갈 때면 마찬가지다. 삼삼오오 그 체험을 소개하고 어디가 어땠는데, 이걸 받으면서 어떻게 나아졌다는 식의 전도(?) 같은 저들의 열의에 나는 그저 안쓰러움만이 먼저 든다. 종종 그 앞에서 내부를 들여다보곤 하는데, 제품을 설명하고 분위기를 띄우려는지 타령이나 트로트로 흥을 돋으면서, 박수를 치고 서로 격려를 하고 응원을 하는 사회자를 바라보고 있는 백발의 노모들 뒷모습이 나에게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야말로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아니겠나? 돈이 좀 된다 싶으면 내남없이 달려들어 죽기 살기로 기를 쓰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향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반드시 그러실 것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10).”
이미 오신 주를 마다하고 새로운 구주를 영접하려 드는 세상에서, 나는 이대로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게 말씀을 읽고 그에 따른 본문을 준비하다보면 충분히 족한 것이어서, 나만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게 평온할 때면, 감사로 인해 저들의 세상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 109:30-31).”
이를 확실히 알아 온전한 데 서라.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출 22:31).” 결코 우리는 개처럼 벌어서는 안 된다. 정승처럼 쓸 수 있는 돈이란 없다. 오히려 더 사악한 개가 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게 세상 재물이다. 결국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18).” 안다고 하고, 자신이 아는 것으로 세상을 휘두르려고 하는 모든 이를 지칭한다. 저들은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9).” 지시적인 의미와 함께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말씀이다.
개처럼 벌면 개처럼 쓰게 돼 있다. 이를 우리로 알게 하시며,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22).” 저들을 두고 이는 안타까움은 어쩌면 우리의 숙명이다. 결코 저들 곁붙을 쬐지 말며, 들에서 찢긴 ‘눈 먼 돈’을 탐하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에게나 족하다.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31).” 말씀이 우릴 붙드신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다만 우리는 기도할 뿐이다.
그래서 사도는 차라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로 작정한 것이구나!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것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3:11).” 저를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다른 방법은 없다. 우리의 그 모든 죄 값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달아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만큼 악하고 또 악한 세상이다. 선을 도모하나 그것도 악할 뿐이라. 순수함을 주장하면 할수록 사악함만 드러날 뿐이다.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시 109:21).” 다만 우리는 기도할 뿐이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22).” 이 땅에 맞서 싸울 이는 우리 자신이 아니다. 주님이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26).” 곧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27).”
그러므로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30-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