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전봉석 2019. 1. 25. 07:1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애굽기 24:6-7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시편 111:9

 

 

 

각기 다른 말씀인 것 같은데 각각의 말씀은 한목소리를 낸다. 곧 우리를 속량하셨고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피를 흘리셨다는 것.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다른 더 나은 방법이 있었으면 그리하셨을 것인데,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삼하 14:14).” 나는 이 말씀에 붙들려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이를 키워드로 놓고 전도서를 읽었다. 덧없는 세상을 가장 덕 있는 삶으로 사는 길은, 그 때와 시기를 알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 그런데도 얼마나 자주 그 때를 알고자 하는지. 그러느라 정작 맡기신 일을 등한히 여기는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8).” 이와 같은 삶의 정의 앞에 붙들려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아이들이 와서 한참을 머물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탁구를 치다 갔다. 이제들 각자 성경을 가져다가 잠언을 한 장 읽고 그 가운데 한 구절을 붙들고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익숙해졌다. 초딩들도 중딩 누나들이 있어서 그런지 어울리지 않게 조용하고 진지하였다.

 

늘 같은 모습에 나의 일상이 아이들에겐 어찌 비쳐질까? 한 녀석이 말씀을 읽고 그것이 마음에 와 닿는데 무슨 뜻인지 어렵다며 물었다.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잠 24:15).” 늘 순하디 순한 녀석이라 항상 보면 다른 아이들의 먹잇감이 되는 형국이라. 전 시간에도 기껏 같이 수업을 잘 하고 돌아가는 길에 다른 녀석이 아이의 집에 사는 아저씨와 진짜 아빠를 들먹이며 꼬투리를 잡은 일이 생겼다. 아이는 억울해했지만 또 먼저 사과를 하였다.

 

그 이야기를 쓰면 되겠다! 하고 넌지시 눈짓하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 아이를 놀렸던 녀석이 다음 구절을 읽고 의미를 묻는 것이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17).” 순간 나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데 경이로웠다. 그것도 방학 동안에 중딩이랑 같이 하기로 해서 각자 읽고 한 구절의 말씀에 붙드는 것인데, 마치 내가 일부러 그리 골라준 것처럼 적절하였다.

 

아이들이라고 결코 모르는 게 아니다. 우리의 지성으로는 알 수 없다 해도 영성의 활동은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종종 이를 느끼는 게, 도대체 이런 말을 이 애한테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싶었는데, 한참 뒤에 나도 잊고 있었는데 분명한 변화가 있고 어떤 일이 생겨난 것을 알 수 있다. 다들 공감하는 ‘한 아이’가 있다. 얘는 서로가 피하며 같이 하기 싫어했다. 말을 안 듣는 건 둘째 치고, 자기 분에 겨워 욕을 하고 책을 던지고 엎드려 울어버리는 아이였다.

 

그러니 어쩐다? 오지 말라 할 수도 없고, 걔만 어떻게 분리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저 같이 말씀 앞에 앉히는 수밖에. 처음엔 읽지도 못하고, 읽은 걸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러니 쓸 게 없다고 버티기 일쑤여서 다른 애들까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기 일쑤였는데. 이제 얼추 1년쯤 되었을까? 그러든가 말든가, 같이 성경을 읽었고 심지어 쓸 얘기가 없다 그러면 잠언을 한 장 필사하게 하였었다. 그 아이가 달라진 것이다. 모두와 허물없이 지내고 심지어 다른 아이들을 위해 간식도 가져 온다!

 

우리를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부르셨다는 것. 왜 여기서 이 일을 하고 있나, 누가 물으면 나는 결코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별로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지만, ‘이 아이 때문이었구나!’ 싶은 어떤 확신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어제도 각각의 말씀이 두 아이를 붙들고 전 주에 있었던 일을 돌아보게 하시고 말씀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다 마주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그 문제를 주 앞에 내어놓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결코 이 또한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데 놀라울 따름이었다.

 

누가 정해준들 그 말씀이 마음을 붙들까? 스스로 느끼는 ‘주의 부르심’에 붙들려 사는 삶이 덕 있는 삶이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다 ‘증인이 되리라.’ 주께서 어찌 우리 삶에 관여하시고, 그 개입은 궁극적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지금도 여전히 교회에 나오지 않고, 스스로 안 믿는 사람으로 사는 모양새지만.

 

성경은 나로 하여금 조급하게 굴지 않게 하신다. 나는 다만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살펴 말로다 저들에게 들려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구절을 두고 물으면 그 어휘나 어원을 운운하고 시가와 때를 가늠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는 일. 그렇지 않을 때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고 허망한지에 대하여,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 89:47).”

 

그리 두신 이의 놀라우신 섭리 가운데서 우리로 지혜의 마음의 마음을.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 그러므로 은근히 다가와 아이가 속엣 얘길 들려줄 때의 감동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게 하는 소리도 아닐 거였다. 나는 듣고 기도할 뿐이어서, 아이가 감당하느라 어린 것이 위경련이 잦고 고질적인 우울감으로 시달리고, 그래서 혼자 노래방을 찾고 아니면 두문불출 며칠씩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줄창 유튜브나 TV에 빠져 있었으니.

 

나는 종종 저들 아이들 마음을 헤아려, 같이 있는 동안에 내가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증인이 되는 것뿐이다. 그저 이 세상은 지나감이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0-31).” 무엇보다 나는 말씀이 우리 곁에 얼마나 가까이 계시는가를 알려주고 들려주고 보여주는 사람이다.

 

멋진 구호나 감상하기 좋은 격언의 정도가 아니라 지지고 볶고 지긋지긋하여 넌더리나는 일상에서 언제든 한 입 베어 물어 오물거릴 수 있는, 씹어 삼키면 우리 영혼에 골고루 영양분이 되어준다는 것을. 나에게 말씀은 실상이고 실지인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도 자신들이 읽고 의미를 묵상한 그 한 구절의 내용이 실제 그 삶을 경작하고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지금은 어찌 설명할 길도, 또한 스스로 그리 이해한 것을 바로 알 수도 없지만.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종종 아이들에게 아무 이야기도 괜찮아! 하고 말한다. 그 ‘아무 이야기’도 실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늘 볶이며 사는 삶의 이야기인 것을. 그리하여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로, 기쁜 자는 기쁘지 않은 것 같이, 매매하는 자는 없는 것 같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는 당부가 아닌 명령이었다. 너무 지나치게 애쓰고 수고하는 일에 대하여 성경은 엄히 경고하고 계신 것이다. 그 부질없음에 소모되는 인생에 대하여.

 

그래서 항상 보면 젊음과 건강이 가장 위태롭다. 이를 장담하기가 너무 짧아서 말이다. 그리하여 전도자는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그게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이 모두의 의를 주장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 고로 우리는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하였던 것처럼 보혈을 지난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이를 위해 부르심인 것이다. 하면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할 것이다(출 24:6-7). 여전히 미숙하고 또 금세 헝클어져, 다음 장으로 이어질 ‘금송아지 사건’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 111:9).” 저는 전능자시라.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다른 어떤 길보다, 스스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나는 말씀을 증거 하는 삶이란 말로다 대중들 앞에 선포하고 들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미련한 전도’란 그리 사는 것이었다. 나의 말 한 마디, 관심 하나, 그리 사는 규칙적인 생활 태도 하나에서 아이들은 종종 그리 따라하려 한다는 것을 의식하는 일이다. 그런 자로 어찌 허투루 살까! 늘 두렵고 떨리는 바는 그것이었다. 고로 묵묵히 주어진 일상을 주의 이름으로 사는 게 사명이었다.

 

곧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2-13).” 이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여겨, 인생이란 그리하여 소중한 것이었다. 아직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 삶으로 주를 증거하는 삶이란, 이제 그 때가 찼다는 것!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이러한 일련의 일상과 그 가운데 놓이는 감정과 상황과 모든 여건이 종국에는 주의 영광을 위함이라. 곧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나는 전하여야 할 말씀 앞에 내가 먼저 늘 붙들리는 것에 큰 은혜를 느낀다. 나 같은 이를 어찌 부르셨는가했더니 결국은 나의 한 영혼을 위한, 저 아이 하나를 위한, 우리 그 한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선택이셨다.

 

고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