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출애굽기 25:39-40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12:1
‘삼가 이 산에서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말씀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게 두신 이 모든 날이 선물이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2-13).” 이를 멀리하거나 외면하고 사는 삶은 각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찌 해보려고 하는 만큼은 고달프고 고달플 따름이었다.
결국 다 때가 찬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이 길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그 없음 앞에서의 난간함을 뚫고 가는 길은 ‘보이신 양식대로.’
우리에게 있는 최종적인 권위는 말씀이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눅 1:1).” 이를 간직하고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또한 그 전하여준 ‘양식대로’ 사는 삶이 복되었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2).” 관심은 있고 우호적이기는 하나 늘 한 뼘 거리를 두고, 멀찍이 서서 관망하는 이 시대의 ‘데오빌로’들에게.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3).” 앞서간 이들이 몸으로 쓴 말씀이 오늘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차례로 써 보내는 것’이 삶이다. 곧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 자꾸 엉뚱한 데 열심을 두고 사는 게 아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8).” 그리하여 복음을 산다는 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하는 말씀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얽매임이 아니라 자유함이고 억눌림이 아니라 더 높은 기상이며, 막힘이 아니라 원활함이고 매임이 아니라 풀려남이었다. 잃으면 얻는 원리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세상은 이를 쟁론하기 좋아한다. 그저 관심을 두고 있을 뿐, 굳이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을 필요를 못 느끼는 이 시대의 데오빌로들에게.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출 25:39-40).” 일일이 열거하는 세심한 삶의 방도가 귀하였다. 결국은 우리가 이를 믿느냐 안 믿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의 말씀이 성경이고 이를 기록하는 자들의 삶이 증거이며 이로써 우리에게는 주를 경외함이 즐거움이 되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볕이 따가울 정도로 한낮에는 고루 햇살이 들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이를 어찌 상식적인 기준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머리로는 알 수 없으나 가슴으로 느껴지고, 가슴이 뜨거워져 삶으로 드려지기를 바라는 삶은 더 이상 세상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그리하지 않아도 족한 것이다.
누가 누굴 음해하고, 가짜뉴스가 판치고, 사람들은 현혹되고, 난리와 난리, 소문은 끝도 없이 사회를 어지럽히는데. 여기는 어디인가? 싶을 정도로 평온하고 나른한 하루였다. 아무하고도 통화도 하지 않은 날이어서 거의 입을 다문 채 설교 원고를 다듬고, 새로 산 책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를 읽고, 청소기를 돌리고, 주보를 만들고, 아이 퇴근 시간에 맞춰 하루 일과를 묻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가 또 한 주가 금세 지나갔다. 보면 점점 관심의 저쪽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누구를 지지하고 어떤 일에 매료되어 무엇을 좇고 추구하고 뜻을 모아 한데 어울리는 일 따위들에서 홀가분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 안에는 여전히 왜곡된 감정과 뒤틀린 의식과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어서 불쑥 누가, 무엇이 휘저으면 삽시간에 탁해지곤 하는 것이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이처럼 나의 속사람이 온전하여지기를 바라시는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는 반문에 그리 살고 그리 말씀하신 이의 삶이 표본으로 증거되는 게 말씀이었다. 하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 뚜렷한 목적이 오늘 우리의 경로를 비친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시 112:5).” 그것까지도 ‘성령이 임하시면’ 가능한 것이어서 나는 다만 애통하는 것이고 심령이 가난해지는 길뿐이었다.
하물며 내 속에도 수시로 드는 비난과 의문과 원성이 가득한데, 우리 곁의 숱한 ‘데오빌로’들에게 우리는 여전히 들리고 보이고 읽히는 존재여야 한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 24:25-26).” 그게 그러니까 우리 임의로 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어서.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7).”
성경을 붙들고 사는 게 귀하였다. 이 모든 기록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44).” 그 유일한 길,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는,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45).” 그러할 때 세상의 온갖 소음이 잠잠해진다. 악다구니하며 서로들 저주하며 사는 세상에서 그 온갖 소리가 창 밖에 있을 뿐이다.
문득 저쪽과 이쪽의 경계를 생각하였다. 나로 여기에 두시는 데 감사하였다. 새삼 그 간격이 엄청나다는 데 놀라웠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진리가 무엇이냐?’ 숱하게 많은 ‘빌라도’들의 의문과 ‘데오빌로’들의 관심으로는 어림없다. 묻고 들으려 하지 않고, 알면서도 이리 오려고 하지 않는 데는 그 경계가 분명한 것이어서. 새삼 나의 평온함이 아찔한 경계의 이쪽이었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오늘만 잠깐 있다 없어질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4).” 느릿느릿 나의 하루는 그렇게 일러주었다. 하나님이, 베푸셨도다. 나의 이 한 날의 평온함에 대하여.
마치 내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정의를 부르짖으며 우후죽순 뛰어드는 사람들의 행태가 오히려 큰 교훈을 더한다. 명분을 내세우고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들먹이며, 듣는 것만 듣고 보는 것만 보는 사람들의 이합집산을 뉴스로 접하면서. 오늘 나에게 주신 날의 수고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저는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이시다. 또한 나를 위해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예수를 힘입어, 복음을 덧입어,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 한 날의 삶이 족한 것이었다. 능히 도우실 이시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2:18).” 그것은 나보다 앞서 나의 고난을 당하신 이시다. 그러므로 내가 능력주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결국은 나를 강건케하심이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딤후 4:17).”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크게 동의하고 동감하며 감사할 수 있는, 내 안의 임하심이 귀한 거였다. 고로 더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의뢰할 따름이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 112:7).”
곧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8).” 결국 저들의 결국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어서 오히려 안 됐다. 저를 긍휼히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9).” 내어줌으로 더해지는 삶의 원리가 귀하였다. 아무리 이를 전하고 들려주어 설명한다 해도, 숱한 빌라도와 데오빌로들에게.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10).” 아멘.